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던 날,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던 날 그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세상이 마냥 비합리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어제 오후 국회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약간 아슬아슬했지만 끝내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는 걸 보면서, 나는 아주 느리긴 하지만 거대하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을 느꼈다. 이 시대는 왕과 귀족이 중심이 되는 정치가 아니라 시민이 중심이 되는 민주정치를 요구하고 있었다. 여전히 광화문에서 탄핵 된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역사적 유물처럼 여겨졌다. 우리 속 뿌리 깊은 편견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이번 상황이 정의가 불의를 이긴 상황이라고, 내가 옳고 상대가 마냥 악하고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다수 시민의 의지와 열망이 시민의 대리인인 국회의원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정치적인 차원에서 관철되었다고 본다. 그 건전한 시민의 상식은 우리가 지금껏 얻은 역사적 경험들로부터 차근차근 힘겹게 쌓아 올린 것이며, 이러한 상식을 얻고 지키기 위한 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 한 현직 국회의원은 과연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이 우리나라의 시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지 물었다. 이렇듯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는 다른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여전히 많이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상식은 만들고 지켜가고 교육하고 설득하는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처음부터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실감한다.
나는 국립대학 교수로서, 지난주인 12월 3일 밤 이루어진 불법적인 비상계엄 시행 이후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학생들 앞에서 이 상황에 대한 나의 정치적인 입장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한쪽이 마냥 옳고 한쪽이 마냥 틀릴 수는 없다. 다만 국가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 합의하여 나라 운영의 근간으로 삼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규칙인 헌법과 법률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비상계엄 시행과 그에 따른 포고령 내용은 명백히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므로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 규칙인 헌법의 생성, 수정, 폐기는 오직 민주 사회의 원리에 따라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 나는 강의실에서 한동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리라 예상한다. 대통령 탄핵안을 의결한 것은 시민의 대리인인 국회의원이다. 때때로 시민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국회의원이 잘 활동하고 있는지 감시할 필요가 있지만, 결국 분업의 원리에 따라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당연히 과학철학 연구와 교육이다. 내 삶 역시 우리나라 과학철학 연구와 교육 역사의 일부다. 나의 개인적인 한계와 우리 시대의 한계가 고스란히 나의 과학철학에 담길 것이다. 나의 과학철학은 미래의 과학철학을 위한 하나의 디딤돌일 뿐이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내 몫의 운명이다. 광장에서 쓰러졌던 사람들 하나하나의 피가 모여 오늘의 건전한 상식을 꽃피웠듯, 나 또한 평범한 한 명의 연구자로서 우리 사회의 집단 지성을 위해 자그마한 내 몫의 일을 할 따름이다.
동학농민혁명 이래로 지금껏 우리나라의 혁명은 다수의 시민이 소수의 폭력적 전제 정치에 저항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어제 있었던 대통령 탄핵 또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나는 내 몫의 운명과 나의 과학철학을 그와 같은 차원에서 생각한다. 과학적 지식의 의의와 기능을 소수의 전문가가 아닌 상식적 차원에서 재해석하고 해설하는 일이 내 몫의 과학철학이다. 이 세상에 왕과 귀족은 없고 그 기본 권리와 인식적 능력에서 모두 평등한 시민들만 있을 뿐이라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자연을 다루는 과학적 지식에도 적용하는 일이 내 몫의 운명이며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도도한 역사적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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