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철학적인 인간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계속 책을 읽었고 생각했으며 글을 썼다. 그런데 내가 철학적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철학적 인간이 수학을 비롯한 인간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고, 당시 철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나는 물리학자가 되려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나는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과학을 배우며 확실하게 깨달았다. 나는 수학과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철학적 인간이지, 전문적인 수학자와 과학자가 될 사람은 아니었다.
흥미로운 것은, 나는 아주 진지한 사람이지만 아주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말 공부를 잘해서 시험 성적을 잘 받는 친구들은 따로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 질 수 없었다. 경쟁의 규칙을 따르며 적어도 싸움에서 뒤지지는 않아야 했다. 따라서 나는 내 나름의 전략을 썼다. 과학고등학교에서 자퇴한 것은 대입 수학능력시험에 승부를 걸어 내신 성적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우리 사회 제도의 범위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수해야만 했다. 수능 이후에도 사회의 편견과 싸워야 했다. 철학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며, 철학을 전공하면 먹고 살기가 힘들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쉽게 직장을 내어주지 않았다.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연철학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이미 성립된 제도 내에서의 교과과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나는 잘 알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대학에서도 스스로 공부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 그랬기에 나는 대학에서도 공부를 잘하는 모범적인 학생이 아니었다. 기존의 사회적 질서는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가려 하는 사람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계속 기존의 질서와 타협하고 싸우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 나간다. 대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생각에 내가 추구하는 방식의 과학철학은 매우 전통적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부당한 처우를 감수하면서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의 철학적 탐구를 이어가는 과정 중에서 쉬웠던 과정은 단 하나도 없었으며, 소위 말하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도 없었다. 고등학교에서도 매우 진지했으나 공부를 잘 하지 못했고, 대학교에서도 늘 과학철학을 외치고 다녔으되 전액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학점이 좋은 학생이 아니었으며, 대학원에서도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해 교수가 될 만한 재목은 아니었다. 나의 인생 경로에는 늘 의외의 요소들이 있었다. 철학을 전공했으되 통신 장교로서 복무했고, 문학사로 졸업했으되 이학석사와 이학박사를 받았으며, 행정학과 경제학을 공부해서 입사할 수 있는 한국장학재단에 들어갔으며, 이공계열 전공자가 입사하는 국립대구과학관에서 일했다. 결코 ‘일반적인’ 이력은 아니었다.
겨우 박사학위를 받은 내가 대학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고 나 자신도 그랬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그랬듯 세상의 편견에 맞섰고, 결과적으로 보면 박사학위 취득 이후 1년 만에 대학교수가 되었다. 아주 의외의 일이었고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런 세상의 우연을 기꺼이 긍정하며 나는 내 안에 철학적 탐구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의 삶은 쉬울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내 삶이 전혀 쉽지 않았던 것처럼, 앞으로의 내 삶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죽을 때까지 삶의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나는 철학자로서 한반도와 대한민국의 철학 전통을 이어나간다. 철학자로서 나의 정체성이 다소 특이해 보일 수 있다. 철학박사도 아니고, 철학과 소속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분명 철학자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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