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왜 철학은 계속 철학이 무엇인지를 물을까

강형구 2024. 10. 6. 06:41

   과학사가이자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은 과학의 특징을 ‘정상과학’이라 했다. ‘정상과학’이 되면 표준적인 모형, 문제 풀이 방식이 안정적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철학적인 논쟁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과학의 이와 같은 ‘안정적인’ 측면은 과학 하는 인간 정신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마치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자아와 초자아가 정신 구조 전체에서 아주 작은 일부를 차지할 뿐인 것처럼 말이다. 표면적으로는 억제되어 있지만 무의식에서는 늘 철학적 경이로움과 질문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미 쿤은 과학의 ‘진화로서의 진보’를 말할 때 철학의 강인한 생명력을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패러다임의 가장 강력한 적은 패러다임 자신’이라는 쿤의 주장도 아주 깊은 통찰을 주긴 한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쿤이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 비록 진화가 최종적으로 자연적인 선택을 통해 일어나긴 하지만, 무작위적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는 것은 다름 아닌 능동적인 생명체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실제로 철학적 욕망과 사유는 그와 같은 무작위적 유전자 변이와 같다. 자연 세계에 잘 먹히는 과학적 실천과 지식이 두루뭉술하게라도 존재하는 것은 맞다. 문제는 이에 대한 해석과 의미 부여다. 해석과 의미 부여의 길은 늘 열려 있어,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인간은 해석과 의미 부여의 자유를 갖는다.

 

   철학적 욕망, 사유, 해석과 의미 부여는 과학의 ‘유령’이다. 비록 평소에 과학자들이 쿤식의 ‘정상과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치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성적 욕망이 인간 행위의 가장 큰 동력을 제시하는 것처럼, 과학적 지식이 우리에게 주는 본질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늘 강렬하고 요동친다. 인간은 살아있다. 그 단순한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면서도, 이미 살아 있으면서도, 늘 인간은 삶의 ‘의미’를 갈구한다. 이러한 해석과 의미 부여의 갈구는 잉여적인 것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생명의 강렬한 표현이다. 인간은 살아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삶의 해석과 의미를 요청한다.

 

   두 발 달린 동물인 인간 모두가 특정한 측면에서 일종의 형이상학자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모든 철학적 해석과 의미 부여는 불완전한데, 내가 볼 때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본질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애초에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늘 불완전한 채로 세계와 자연에 당면하여 살아남아야 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발명과 상호 소통을 통해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인간이 집단으로 발명한 유용한 발명품 중의 하나가 ‘철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인간이 창조한 가장 오랜 발명품이다. 그것은 신화이자 신학이었던 적이 있었고, 사색과 성찰이라는 금욕적이고 근엄한 형태를 띠기도 했지만, 결국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그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 종의 강렬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오래전 철학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하고 있는 나 역시 왜 철학은 이토록 다양한지, 왜 늘 철학적 해석과 의미 부여는 지치지도 않고 새롭게 다시 시작되는지를 궁금해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골치가 아픈 철학적인 생각을 하느냐? 그러면서도 가끔은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왜 넌 너만의 철학이 없는 거냐? 인간을 반은 동물이지만 반은 신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철학적 사유다. 그것에 정답이 있어서가 아니다. 정답은 근사하게 만들어진 허구적 체계 안에서 가능하고, 늘 인간은 그런 체계 안에서 살아가고 안도의 한숨을 쉬지만, 그것이 허구이며 세계에는 다른 해석과 의미 부여가 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 속에서 늘 철학은 인간에게 그 얼굴을 다시 들이민다.

 

   왜 철학은 계속 철학이 무엇인지를 물을까? 그것은 인간이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인간이 직면하는 이 세계와 자연이 계속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멸종되지 않는 한 철학은 계속될 것이며, 스스로에게 묻는 철학의 이러한 질문 역시 지치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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