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 서민 또는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내 가까운 가족 중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사람은 없었다. 큰아버지께서 대구에 소재한 한 농협의 지점장을 하셨다는 정도? 그런데 그 사실이 우리 가족에게 특별히 도움이 된 것은 없었다. 내가 성인이 된 이후 셋째 고모부께서 모 사립은행의 부행장까지 오르신 적이 있지만, 내가 고모부로부터 사적인 도움을 받은 일은 전혀 없다. 나는 국사와 세계사를 싫어하지 않았지만, 역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대학에서도 국사학, 서양사학, 동양사학(철학, 미학, 종교학, 고고미술사학을 포함하여)을 전공으로 선택할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철학을 선택했으며 역사학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또한 나는 스스로 보수 성향의 인물이라 생각한다. 나의 경우 지금껏 살아오며 기존의 우리 사회 체제를 부정하거나 급격히 변화시키고 싶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보수(保守)’란, 급격한 사회적 개혁보다는 기존 사회 체제의 점진적인 수정과 보완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정치적 입장이다. 이에 반해 ‘진보(進步)’란, 기존의 사회 제도에 혁신적이고 강력한 변화를 꾀함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정치적 입장이다. 결국 보수이든 진보이든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보수는 진보보다는 더 전통과 안정을 중시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을 부정하지 않는다. 구한 말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에도 큰 공감을 갖는다.
그런데 나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임에도 불구하고 친일매국 인물들을 규탄한다. 만약 내가 대한제국 말기에 서민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일본제국에 저항했을 것이다. 과연 내가 나의 목숨까지 걸고 저항을 할 수 있었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확답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소극적인 방식으로라도 계속 저항했을 것이다. 나의 힘으로 일본제국을 막을 수 없을 거라 보았다면, 아마도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민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내가 청년이었다면 한 명의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여했을 것이고, 그 와중에 사망했을지 모른다.
올해 한국의 아티스트 그룹인 ‘뉴진스(NewJeans)’가 일본 도쿄에서 성공적으로 행사를 진행했을 때 나는 한국인으로서 뿌듯했다. 일본 진출을 위해 발표한 노래에 한국어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만족스러웠다. 뉴진스의 일본 진출과 그 성공은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일본에 내어주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대등한 방식으로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었고, 특히 한국 음악의 우수성을 일본에 널리 알린 일이었다. 그것은 보수적인 나의 관점에서도 매우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기형적인 정치적 행태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제국의 강압적인 폭력통치가 불법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일본군 위안부가 강제적이고 폭압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부 기관의 요직에 속속들이 들어서고 있다. 내 생각에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은 오히려 더 우리나라의 역사적 정통성에 관심을 가지며 이를 굳건히 지키려고 해야 한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우리 민족이 앞으로도 계속 35년간의 일본제국 식민 통치라는 피눈물 나는 역사를 똑똑하게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일본을 우리와 대등한 협상 및 협력 대상으로 대한다고 해도 그러하다.
친일매국 세력은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 모두가 힘을 합쳐 척결해야 하는 대상이다. 일제 치하 35년은 우리에게 치욕스러운 역사지만, 한없는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투쟁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 선조들의 불굴의 의지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사악한 주장은 결코 용납하거나 수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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