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의 인지 및 성찰 능력이 과학기술 발달 이전과 크게 달라졌을까? 오늘날의 사람은 이미 과학기술의 발전 이전에 진화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서양의 과학기술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조선시대 이후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까지 사람들은 미개한 삶을 살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과학기술이 사람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고 믿는 것은 일종의 신화일 수 있다. 물론 나는 매일 노트북 컴퓨터를 쓰고, 휴대전화를 쓰며, 이것이 과학기술의 산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이 모든 과학기술문명의 이기들 없이도 나는 잘 살 수 있다. 삼국, 고려, 조선 사람들 역시 나름 잘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끝없는 말싸움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람의 사람됨 역사가 사람의 발명품인 과학기술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최근 나는 유튜브를 통해 티베트의 플루트 연주를 들으며 명상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다. 그리고 인도의 승려들, 티베트의 승려들이 한적한 바위 위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이 사람들의 정신적 성숙함이 과연 과학기술문명의 이기를 충분히 누리는 사람들보다 못할까?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수백 년 전 오랫동안 육체와 정신을 수련하며 삶과 세계를 깊이 이해한 사람이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고 더 강인할 수 있다.
과학기술보다 더 견고하고 강력한 것이 사람의 역사다. 사람들이 모여 조직과 집단을 만들고 나라를 만들어 살아온 역사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의 개념은 사람의 역사 속 비교적 최근 서구에서 발명된 새롭고 이상화된 개념일 뿐이다. 사람은 서로 끈끈하게 얽혀 있고,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과 조직은 운명 공동체이며, 조직의 관점에서 보면 개별 사람은 그 힘이 미미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늘 조직 속에서 인정받고 힘을 차지하려 애썼다. 어떤 사람은 그러한 조직의 생태와 습성에 환멸을 느껴 조직을 떠나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자 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오래전부터 내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나 또한 늘 어떤 조직에 속해서 그 테두리 안에 있었다. 내가 개인으로서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것이 사람의 운명이자 숙명이다. 나는 한반도 인근에서 오래전부터 살아온 사람들의 후예로서, 사람이라는 종을 이어가는 개체 중 하나다. 공교롭게도 20세기 말에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으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소속되어, 국립대구과학관이라는 정부 소속의 한 기관에 소속되어, 나라와 조직이 내게 부여한 일을 하며 그 사회적 존재를 영위해 나가고 있을 뿐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4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적 존재인 나라는 개체가 이렇게 사회 속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국립대구과학관 전시연구본부 교육연구실 선임연구원. 나의 운명이 지금 이 자리로 나를 이끌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그저 지금의 내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면서 만족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아내, 세 아이, 부모님, 장모님과 함께 조심하고 만족하면서 소소하게 삶을 꾸려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모두를 생각하면서도 아쉽고 안타까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학철학에 대한 나의 강렬한 애정이다. 그것은 어쩌면 내게는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같은 것이고, 손에 붙잡으면 곧 빠져버리는 신기루 같은 것일 수 있다.
나라는 한갓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나는 그저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하늘과 바람의 움직임과 사람들의 모임인 조직의 움직임을 잘 살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조용히 나의 운명이 내게 건넬 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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