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독립적이면서도 겸손한 삶

강형구 2023. 11. 4. 10:29

   나는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의 사람은 아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나이 때 다니던 대입 재수학원에는 과학고 자퇴생들의 반뿐만 아니라 국제고 자퇴생들의 반도 있었다. 당시 부산과학고와 부산국제고는 위치상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 학생들도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보았는데, 그들 중 한 명이 검정고시에서 수석을 했다고 자랑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왜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의 경우 검정고시 공부를 따로 한 것이 전혀 없이 시험을 치러 합격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범생, 전액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학점을 더 잘 받기 위해서 재수강을 하는 학생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정말로 우리 학과의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도서관에 다녔다. 시험 기간이 아니더라도 나는 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또한 나는 관악산을 사랑했다. 식사한 뒤에는 꼭 관악산을 한 바퀴 돌며 산책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공부를 잘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보다는 도서관에 가면 마주칠 수 있는 사람, 캠퍼스를 거의 매일 규칙적으로 산책하는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학교에서도 거의 매일 가장 저렴한 학생 식당 밥을 먹었다.

 

   군대에 있을 때도 나는 주말에 홍천도서관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면서, 식사는 근처에 있는 김밥천국 등에서 간단하게 때웠다. 도서관 옆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어, 가끔 그곳에서 걷기도 하고 여러 운동을 했다. 대학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침 일찍 연구실에 가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내가 유독 두각을 드러내고 발표를 잘하고 사교성이 좋은 그런 학생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부지런하고 충실하게 나의 일을 했을 뿐, 남들보다 더 잘하려고 애쓰거나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냥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한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러한 나의 모습이, 비교적 평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내 나름의 독립성을 추구해 온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취직 준비를 할 때도 나는 학부 학점이 좋지 않은 데다가 철학과를 졸업했고 나이도 비교적 많다는 여러 핸디캡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단점들을 감수하면서 그냥 정공법으로 취직에 도전하는 방식을 택했다. 모든 과목을 나 스스로 새롭게 공부했다. 내가 직접 양복을 골랐고,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었으며, 면접 준비를 했다. 결국 나는 교육부 산하 중앙 공공기관에 합격했다. 당시 사람들은 공공기관을 ‘신의 직장’이라고 불렀고, 나는 오로지 나의 힘으로 그 직장에 들어간 것이었다.

 

   내가 공무원 또는 공공기관 직원이 되려고 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비교적 명확한 규정과 제도가 갖춰져 있어, 사람이 아니라 규정을 따라 일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에 들어와서도 나는 규정과 업무 분장표에 명시되어 있는 나의 일을 충실하게 하려 했을 뿐, 조직 내부의 정치에 참여해서 더 빨리 더 잘 진급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내게 주어진 공식적인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과 돈을 가지고 내가 원래 하고자 했던 공부인 과학철학을 이어 나갔다. 나는 바로 이와 같은 나의 독립성을 개인적으로 퍽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지적으로 뛰어난 연구자이거나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남긴 연구자는 아니지만, 지금껏 자신의 힘으로 독립적으로 연구를 해 온 사람이다.

 

   나는 자수성가(自手成家)형 연구자다. 물론 내가 이룬 집이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 집은 너무나 부족하고 미숙했던 사람인 내가 각종 시행착오와 행운 및 불운을 겪어가며 일구어낸 소중한 성과이다. 나는 내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고 뛰어난 사람들을 나의 비교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저 나는 내가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공부를 끝까지 해내고, 아내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직장을 가져 집과 차를 장만해서 마음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이를 가능하게 한 숱한 과분한 행운들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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