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바빠도 짜증을 내지 않고 즐겁게 해 나가는 요령을 익히는 것은 중요하면서도 쉽지 않다. 화내지 말고, 짜증 내지 말고, 약간만 더 수고하면 무난하게 풀리는 일들이 참 많다. 그 아주 짧은 순간을 지혜롭게 참아내면 이후 훨씬 더 긴 시간을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대학 졸업 이후 지금까지 제법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직 이런 점에 있어서 퍽 미숙한 것 같다. 여전히 일을 하며 가끔씩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은 나의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사실 나는 요즘 ‘더 바랄 게 없다’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내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고, 부모님과 장모님도 차를 운전하면 2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살고 계셔 필요할 때면 부담 없이 찾아뵐 수 있다. 직장도 있고, 비록 대출금이 있긴 하지만 우리 가족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집도 마련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집값이 저렴했던 까닭에 아늑한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고 나는 이를 참 감사하게 생각한다. 직장에서도 운이 좋아 몇 년 전 진급했고, 늦게나마 박사학위를 받아 학술 활동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예전부터 이루고 싶던 일들을 대부분 다 이룬 셈이고, 여기서 더 크게 바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굳이 내가 어떤 것에 집착하거나 불필요한 자존심을 내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 생각에 사람 사이의 의견 다툼 혹은 대립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발생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다.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모이기만 하면 그 속에서 의견 다툼과 대립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사람과 친한 반면 다른 사람과는 친하지 않다. 이런 의견 다툼, 대립, 이합집산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이며 일종의 ‘명백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그런데 내가 이런 인간 본성을 ‘초월’할 수 있을까? 내가 철학 연구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할까? 나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과의 부대낌 및 다툼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의식적으로 이러한 나의 인간적 본성을 완화시킬 수 있고, 이러한 완화의 과정에서 철학적 ‘성찰’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이미 내가 이번 생에서 원하는 바들을 대부분 다 이루었으므로, 크게 욕심을 부릴 이유도 없고 자존심을 내세울 이유도 없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나를 낮추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좀 더 애쓰는 것은 굳이 내가 크게 손해를 보는 일도 아니고 내 입장에서 억울한 일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나의 만족 기준이 너무 낮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고작 그 정도를 이룬 것 가지고 왜 벌써 만족하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잘 돌봐주어야 하고, 직장에서도 더 승진해서 부서장 및 본부장이 되어야 하며, 지금보다 논문도 더 많이 쓰고 책도 더 많이 번역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그런 종류의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 사실 나는 설혹 당장 내일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고 해도 크게 후회가 없을 것 같다. 아이들은 나 없이도, 오직 나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잘 클 것이다. 나는 직장에서도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없다. 좋은 논문을 쓰고 좋은 책을 번역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나는 지금껏 내가 쓰고 번역한 논문과 책만으로도 대략 나의 철학적인 관점을 어느 정도는 공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내가 지금껏 이룬 것을 아직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집을 구하지 못하고 박사학위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노력하긴 했지만 나 또한 많은 행운으로 인해 이런 것들을 이룰 수 있었다. 다만 적어도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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