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때로는 맹목적으로

강형구 2023. 9. 7. 23:09

   나는 20세기 경험주의를 대표하는 과학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가 1938년에 출판한 [경험과 예측]을 번역하여 최근 출판사에 넘겼다. 돌이켜보면 내가 라이헨바흐의 저술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2004년부터 시작했다. 어느덧 20년 정도가 지난 셈이다. 지금 나는 그의 유고작인 [시간의 방향]을 번역하고 있다. 한 명의 과학철학자의 여러 저술을 계속 번역하는 일은 과학철학계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지만, 철학계에서는 비슷한 일들을 종종 찾을 수 있다. 나는 철학과를 졸업했으므로, 특히 칸트 연구자이신 백종현 교수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므로, 이런 식의 연구 작업이 어색하지 않다.

 

   동시대의 과학 지식에 대한 아주 정확한 이해를 갖춘 철학적 정신은 꼭 필요하다. 동시대의 철학 지식에 대한 아주 정확한 이해를 갖춘 과학적 정신이 꼭 필요한 것과 같다. 나는 아인슈타인을 후자의 유형에 속하는 인물로서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과학적 정신이 철학적 정신과 그 유형 상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두 정신이 반드시 분리된 육체에 있을 필요는 없다. 이런 예를 들 수도 있다. 어떤 장군은 전쟁에 참여해서 많은 전투를 지휘했고 직접 적과 싸우기도 했다. 전투에 참여하던 순간 그는 승리를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런 그가 전투가 끝난 다음 그 전투가 진행된 과정, 자신이 승리 또는 패배했던 이유를 되새기며 성찰하거나, 과연 자신이 치른 전투가 더 큰 전쟁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을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어떤 사람은 어떨 때는 과학적으로 작업하지만, 다른 때는 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정신이 한 육체에 동등하게 있기란 어렵다. 어떤 사람은 좀 더 과학적이거나 좀 더 철학적일 수 있지만, 동등하게 과학적이면서 철학적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라이헨바흐가 신인가’라며 나를 보고 묻곤 한다. 물론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이 완벽하지 못할지라도, 우선 우리는 그 사람의 사상이 무엇인지를 아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그런 작업이 안 되어 있다면- 그게 우연에 의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누군가는 그 작업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번역을 한다. 번역은 정직하며, 이 세상에 번역보다 더 정밀한 독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번역은 지루하다. 눈으로 보면 빨리 지나칠 수 있는 외국어 문장들을 하나씩 다시 모국어로 옮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은 일종의 고통스러운 노동이기도 하다.

 

   결국 나의 최종 목표는 라이헨바흐를 온전하게 넘어서는 것이다. 완전하게 파악해서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누군가의 추종자가 되는 것은 나의 기본적인 성향과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마스터를 존경한다. 라이헨바흐는 나에게는 일종의 마스터와 같은 존재다. 과연 그 마스터가 남긴 무공 비법들을 완벽하게 습득하여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될 것인가.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그런 사람이 나올 수 있도록 미리 기반을 닦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라이헨바흐가 20세기의 경험주의자였듯, 그의 저작을 바탕으로 21세기의 경험주의 철학 정신이 나타나야 한다. 나는 그런 믿음 혹은 신념을 갖고 나의 번역 작업을 조금씩 진행하고 있다.

 

   이런 오랜 작업에 어찌 나 역시 지치지 않겠나. 그럴 때는 어느 정도의 맹목성이 필요한 법이다. 이런저런 고민하지 말고 그냥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하며 해 나가는 것이다. 어차피 “반드시 번역해야 하는 책”이라면, 어떻게든 번역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간의 방향]이 우리나라의 독자들 특히 과학철학 연구자들에게 하나의 신선한 빛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에게는 원전에 대한 요약본 혹은 서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원전 그 자체가 필요하다. 나는 외국어가 아닌 우리말로 된 원전을 곁에 두기 위해 이렇게 조금씩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