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정체성에 대한 단상

강형구 2014. 5. 12. 20:25

   2014년 5월 31일에 나는 결혼을 한다. 올해 내 나이 서른 세 살,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드디어 결혼을 한다. 결혼을 한다는 것이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 스스로 택한 길이고, 결코 후회는 없으며, 나는 나의 결혼이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은혜와는 내가 스물 일곱일 때에 처음 만났다. 은혜를 처음 만났을 때 은혜는 서울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었고, 우리는 자하연 벤치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 때 우리는 같이 식사도 했다. 둘이서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한정식 집에서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은혜의 진가를 잘 몰랐다. 지금 나는 은혜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게 될 시점이 되니, 새삼스럽게 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나는 혁신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을 되새겨보기를 좋아했고, 학교에서 제시하는 과제들을 의무적으로 수행했다. 학창시절 공부는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일을 하는 것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엇인가 '나만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내게는 낯선 일이었다. 나는 배운 것들을 다시 생각하고, 그것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졌을 따름이다.

 

   물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추구하지 않는 것, 검소하고 소박하며 성실하게 사는 것을 나는 어린 시절부터 바랐다. 너무 욕심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운이 많이 따랐던 것 같다. 자수성가하신 아버지 덕분에 부족하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고, 그다지 학력 수준이 뛰어나지 않은 중학교에 들어갔던 덕택에 중학교에서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부산과학고등학교에서의 시절은 쉽지 않았지만, 나는 이 시절 동안에 수학과 물리학에 관련한 다양한 책들을 접하고 '과학철학'이라는 낯선 영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

 

   2001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상당히 쉬운 편이었다. 어떤 성적이 나오든 관계 없이 철학과로 가고자 마음 먹었던 나였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출신 대학이 그 이후의 내 삶에 계속 꼬리표처럼 따라 붙게 되었다. 가끔씩 나는 내가 서울대학교가 아니라 다른 대학교에 진학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자문해보곤 한다. 실제로 나는 한양대학교 법학과나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철학은 내 적성에 맞는 학문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밤 늦도록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나는 전형적인 서생 유형의 사람이었다.

 

   나는 진지했지만 그와 동시에 소심했다. 화려한 화술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력도 별로 없었다. 연애에도 굉장히 미숙해서, 학창 시절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했다.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하고 육군장교로 군 복무를 했지만, 내가 장교로 복무한 것은 그저 복무를 통해 돈을 벌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군 복무를 통해 돈을 모으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장교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주말이면 읍내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나는 말이 없는 소같은 남자였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틈틈이 운동 삼아 운동장을 달렸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은혜에게 사귀자고 말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같은 소심한 남자가 어떻게 그럴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생생하게 그 때의 나를 기억한다. 여자에게 그렇게 당당하게 용기를 내어 구애를 한 것은 내겐 은혜가 처음이었다. 만약 은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결혼을 꿈꾸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은혜의 외모, 지성이 아니라 은혜의 밝음과 순수함이었다. 은혜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헤어졌다. 그런데도 나보다 더 밝고 순수했다. 넉넉치 않은 형편 속에서도 밝음과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었던 은혜가 나는 좋았다.

 

   대학에 진학한 것도, 장교로 군 복무를 한 것도,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것도, 은혜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게 된 것도 내게는 분에 넘치는 행운과 행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내게 따라주었던 행운을 믿고 앞날에 대해서 자만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소박하고 성실하며 평범한 삶을 원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는 일 없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성실하게 사는 삶을 원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나는 부와 명예를 바라지 않는다. 무리의 머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이름없이 조용히 자신의 일을 착실하게 해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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