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감사하는 마음

강형구 2016. 7. 10. 21:42

 

 

   돌이켜보면 나는 지금껏 살아오며 분에 겨운 행운의 덕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실하신 부모님 덕택에 배고프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배고픔을 알지 못했기에 세속적인 일들에 태연한 태도를 기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치열하게 살아남을 필요가 없었기에 책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 나는 똑똑한 편은 되지 못했지만, 책을 읽으며 학문에 대한 꿈을 가졌고 그 꿈이 나를 끈기 있게 공부하게 했다. 만약 배가 고팠으면 나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그랬다면 끈덕지게 책상에 앉아 책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좋은 책들을 만나는 행운도 있었다. 나는 나보다 전 세대 선배들이 읽을 수 없었던 좋은 책들을 여럿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의 소개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을 읽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등과 같은 책들을 번역하신 선생님들이 없었다면 나는 감히 과학철학을 공부할 생각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실 나는 대한민국 사교육의 덕도 많이 보았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한 나는 부산의 한 입시학원에서 저렴한 비용을 내고 집중적으로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대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2001년 대입 수학능력시험은 아주 쉬웠다. 만약 어려운 시험이었다면 나는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국립대학교의 등록금이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는 것도 내게는 행운이었다. 게다가 나는 인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기에 자연과학대학이나 공과대학에서는 누릴 수 없는 독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내게는 이상하리만큼 욕심이 없었다. 내게는 먹는 것, 입는 것, 출세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나는 꼴찌를 하지 않을 만큼의 성적에도 만족했다. 4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것, 장교시험에 합격한 것에도 운이 따랐다. 라이헨바흐라는 훌륭한 철학자를 만나 졸업논문을 무사히 쓸 수 있었고, 장교시험은 다행히도 경쟁률이 높지 않았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는 장학금을 받아서 등록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이 나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헤아릴 수 없는 행운들이 나를 지켜주었던 것 같다.

  

   박사과정을 휴학하고 취업을 준비할 때는 많이 고통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결과적으로는 내게 유익함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나는 20161학기를 끝으로 졸업에 필요한 학점인 42학점을 모두 이수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수료 이후 6년 이내에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받아야 하지만, 필요한 경우 2년을 연장할 수 있고 추후 3년을 추가로 연장할 수 있기에, 내게는 아직 8년 정도의 시간이 남은 셈이다. 나는 나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내게는 훌륭하고 멋진 논문을 쓰고 싶은 욕심이 없다. 그저 지금까지 내가 오래도록 고민해오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하나의 완결된 글을 써보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저 나 혼자만을 위한 독백이 아니라, 학술논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다른 학자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연구를 해보고 싶다.

  

   무엇인가 정말 가치 있고 진짜인 것을 해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위대한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나의 옛 야심은 거의 사라졌다. 다만 나는 지금껏 나를 지켜준 행운들에 감사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소박한 작업들을 진행해나가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철학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그리 대단한 학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나의 사랑은 여전하며 그것이 내게 주는 기쁨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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