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재야 학자로서 사는 것 04

강형구 2016. 6. 6. 19:58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면 늘 희망은 있다는 말을 믿는다. 20121월에 취직한 이후 나는 한동안 박사과정 공부를 이어가지 못했다. 2011년 가을학기부터 2년 동안 휴학을 했다. 그런데 직장 생활 2년차인 2013년에 나는 아주 훌륭한 팀장님을 만났다. 팀장님께서는 교육행정학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으시고 박사과정에 진학하려 하셨지만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취직을 하신 분이셔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자 하는 나를 이해해주셨다. 나는 2013년 가을학기부터 오전 8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하는 유연근무제를 활용해, 주로 저녁에 개설되는 강좌를 수강하면서 공부를 근근이 이어갔다.

  

   20152월부터 나는 기획재정부 교육예산과에 파견 근무를 가게 되어 박사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36학점을 수강했지만 추가로 6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나는 파견 근무 중에 세종시 인근에 있는 청주의 한국교원대학교에서 과학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님과 연락을 할 수 있었다. 교수님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으로, 나는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귀국하신 교수님과 여러 번 만났던 적이 있었다. 나는 국립대학 학점교류 제도를 활용해서 남은 6학점을 마저 이수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2016년 봄 학기인 이번 학기를 끝으로 박사과정 학점을 모두 이수하게 된다. 내가 2011년에 박사과정에 입학했으니, 학점 이수를 위해서만 6년이 걸린 셈이다.

  

   대학을 떠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조금이나마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에 기여하고 싶었다. 2013년쯤 출판사에 취직한 대학원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료는 내게 과학철학의 고전을 번역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몇 차례 연락을 한 끝에 우리는 라이헨바흐의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를 번역하기로 했다. 사실 나는 동료에게 이 책이 제법 어려운 책이라 라이헨바흐의 다른 책을 번역할 것을 권유했으나, 동료는 이 책을 번역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그 요청에 응했다. 대학 근처에 숙소를 잡아 생활하던 나는 주말이면 학교에 나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번역 작업을 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계속 공부한다는 생각과 학문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번역을 했다. 번역된 책은 2014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내 생애 최초의 번역서였다.

  

   2015년에는 예전에 학부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 번역했던 라이헨바흐의 책을 조금 다듬어서 출간했다. 그런 까닭에 정확하게 말하자면 새로 번역한 책은 아니었다. 라이헨바흐의 [원자와 우주], [상대성이론의 공리화], [경험과 예측]은 내가 오래 전부터 거듭해서 읽고 있는 책들이며, 이 책들도 조만간 번역해서 출간할 예정이다. 나는 번역을 통해 해당 책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번역을 했다고 해서 그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번역은 공부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저 나는 내 노력의 결과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다른 책들을 보면서 동기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제 겨우 박사과정 수료 학점을 이수했다. 앞으로 논문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박사학위 논문도 써야 한다. 아마 나는 대단하고 유명한 학자는 되지 못할 것이고,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한 연구자로서 이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쓸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학위는 나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저 틈날 때마다 일관되고 끈기 있게 공부하는 것,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는 것, 그것이 재야 학자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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