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재야 학자로서 사는 것 02

강형구 2016. 6. 5. 22:31

 

   내가 중학교 3학년 무렵이던 1997년 말에 금융위기가 우리나라를 덮쳤고, 의류도매상인이셨던 아버지의 주 거래 회사도 1998년 즈음에 부도가 났다. 이후 아버지의 사업은 계속 적자가 나기 시작했고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아버지의 사업이 조금씩 무너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 때부터 나는 어떻게든 세상에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학능력시험을 치르기 몇 달 전에 나는 가족 앞에서 성적이 어떻게 나오든 철학과로 진학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청년이었던 나에게는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작 수학능력시험 결과가 나오자 나는 서울대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대학들에는 법학과로 지원했다. 법을 공부하면 어떻게든 우리 사회에서 먹고 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서울대학교에는 내가 원하는 학과로 지원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 진학한다면 설사 철학과를 졸업한다고 해도 먹고 살 방도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철학과에 가겠다고 말씀드리자 부모님조차도 나중에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에 대해서 걱정하셨다. 사실 대학 3학년이 될 무렵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서양사학과, 동양사학과, 국사학과, 미학과, 철학과, 영문학과, 국문학과 등 인문대학 내에서 학과를 선택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철학과를 선택했다. 철학과 내에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나는 학과 내에서도 혼자 공부하다시피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벗 삼아 공부하는 것에 나는 점점 익숙해져 갔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거의 이해해주지 않았고, 나는 주변의 일반적인 모범생들과는 달리 학점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학부시절부터 공부가 아니라 다른 일로 생계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나는 공부하는 것을 사랑하지만, 이러한 사랑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장교로 복무하게 된 것, 대학원에 입학한 것은 내게는 행운이었던 것 같다. 나는 공군장교가 아니라 육군장교로 지원했는데 당시 육군장교는 지원자가 별로 없어 경쟁률이 그다지 세지 않았다. 대학원 입학시험을 볼 때 나는 교수님들 앞에서 논리실증주의의 역사를 연구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학부 성적이 겨우 B0를 넘었던 나를 뽑아주셨던 교수님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전역 후 나는 대학원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학교에서 제일 가격이 저렴한 밥을 사 먹으면서 새벽에 연구실에 나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원에서도 한스 라이헨바흐를 연구하고자 하는 나의 뜻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뚝심 있게 라이헨바흐를 연구했지만, 나의 연구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박사과정을 한 학기 마치고 휴학한 후, 그간 과외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모아둔 돈으로 취직 준비를 했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 관악도서관에서 다른 취직준비생들과 함께 취업을 준비했다. 인터넷에서 구한 동영상 강의들을 보면서 생전 배운 적이 없었던 법학, 행정학, 경제학, 경영학을 배웠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공공기관 채용 공고가 나면 수시로 지원했다. 서류 전형에서 숱하게 떨어졌고 면접에서도 여러 번 떨어졌다. 자취방에서 고추장과 햄과 양파를 볶아 볶음밥을 해먹으며 공부하던 내게 가끔씩 순대국밥을 사먹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다. 나는 그렇게 취직 준비를 했고 운 좋게도 취직을 할 수가 있었다. 나 역시 그런 피 말리는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오늘날 취직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인문대학 철학과를 학점 3.03으로 졸업했고, 장교로 복무하고 대학원까지 졸업해서 나이가 많던 내가 취직을 했다. 그것은 내게 아직까지도 하나의 기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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