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단순하고 만족하는 삶

강형구 2016. 5. 28. 23:03

 

   라이헨바흐의 [원자와 우주] 번역을 끝내고 잠시 쉬면서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다. 어느 정도 쉬었으니 다시 라이헨바흐의 책을 번역할 때가 왔다. 나에게 번역이란 공부를 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나의 경우 번역을 하면서 번역을 하는 논문이나 책이 더 정확하게 이해가 되는 것을 직접 경험해보았다.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번역이라는 공부 방식보다 더 좋은 공부 방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나는 내게 맞는 공부 방식을 선택하여 작업을 할 따름이며,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 번역해야 할 책은 라이헨바흐의 [상대성이론의 공리화(Axiomatization of the theory of relativity)].

  

   [공리화]는 내가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 주된 분석 대상이 되었던 책이다. 예전에 부분적으로 번역을 해 두었기 때문에 번역에 그다지 어려움이 있지는 않으리라 기대한다. [공리화] 번역이 끝나면 [경험과 예측(Experience and Prediction)]을 번역할 것이다. 이 책은 과학철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책이며, 라이헨바흐가 제시한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구분이 등장하는 책이다. 라이헨바흐의 [기호논리학 기초], [확률론], [법칙적 진술과 허용가능한 연산], [시간의 방향], [상대성이론의 철학적 옹호(Defending Einstein)] 등도 번역이 필요한 책이다. 출판이 되는지의 여부와는 별도로 이 책들은 내가 직접 번역하고 싶다. 이미 번역되어 있는 책들을 굳이 번역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다른 번역자들의 번역을 최대한 존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당초에는 [논리경험주의의 형성과 전개]로 구상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논리경험주의]는 학위 논문에서 다루기에 너무 큰 주제라, [한스 라이헨바흐의 경험주의적 실재론 연구] 정도로 범위를 줄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본다. 논문 범위를 좀 더 좁게 잡는 것이 겸손하면서도 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리라. 대학원에는 최우수 박사학위논문상을 수상하는 선배님들도 계시지만, 나는 그 정도로 높은 수준의 논문을 쓰기를 전혀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저 논문심사를 통과할 수 있는 정도의 논문을 쓰기만을 바랄 뿐이다. 단순하고 우직하게 라이헨바흐를 연구해서 그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나는 라이헨바흐가 과학철학계 내에서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나에게는 최고의 학자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최고인 학자를 연구할 자유와 권리를 갖고 있다.

  

   실로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일관되게 공부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학사, 석사, 박사학위 논문 모두 라이헨바흐에 대해서 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저명한 학자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나의 후배들은 내가 남긴 글들을 통해서 라이헨바흐의 철학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백종현 선생님의 작업을 통해 우리말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칸트의 철학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백종현 선생님처럼 학계에 남아서 학생들과 더불어 공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냉정하게 말해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올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고, 나의 그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직장인으로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을 다 하고자 노력한다.

 

   직장 업무가 끝나면 나는 틈날 때마다 영어와 독일어를 공부하고, 교양과학 온라인 강의들을 수강하며, 라이헨바흐의 책을 번역한다. 이와 같은 나의 오랜 습관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나의 습관이 썩 나쁘지는 않은 습관이라고 생각하며, 어쩌면 이 습관의 산물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에게는 나에게 맞는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위한 받침대의 역할이라고 하여도 나는 그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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