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양식의 차이

강형구 2016. 5. 27. 18:05

 

   토머스 쿤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읽은 이후, 신칸트학파에 속했던 하인리히 리케르트의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을 읽었다. 독서 초반에는 책을 읽어내기가 다소 힘이 들었다. 번역의 문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책의 문장들은 정확하고 읽기 쉽게 번역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양식과 문체였다. 한동안 잘 접하지 못했던 긴 문장과 긴 문단이 이어졌고, 구체적인 사례 분석보다는 정교한 개념 분석에 방점을 둔 서술이 이어졌다. 이렇듯 낯선 것에 적응하는 것에는 늘 그랬듯 시간이 좀 걸렸다. 편한 마음으로 인내심을 갖고 읽다보니 조금씩 양식과 문체에 적응이 되었다.

  

   나는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몇 번 했다. 수학과 과학에 대한 교과서적인 설명만을 읽던 내게 아인슈타인의 글과 하이젠베르크의 글은 일종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일반인을 위해 쓴 [상대성이론]에서 아인슈타인의 문체는 단순 명료하면서도 심오했고,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는 진지하면서도 깊이가 있었다. 쉽게 일반화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겠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철학적 과학자들의 글은 심오하고 깊이가 있었다. 그것은 20세기 후반기 혹은 21세기의 저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글과는 다른 양식과 문체를 갖고 있었다.

  

   하인리히 리케르트는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을 구별하면서, 두 과학을 구분하는 것은 두 과학의 기본적인 전제가 되는 원리라고 주장한다. 리케르트에 따르면 자연과학은 모든 객체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성의 원리에 기반하고, 문화과학은 각각의 객체들이 갖고 있는 일회적이고 개별적인 이질성을 근거로 하는 개성화의 원리에 기반한다. 이러한 구분을 토대로 리케르트는, 두 종류의 과학이 기반하고 있는 원리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문화과학이 자연과학으로 환원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개념 분석을 통해 특정한 결론을 도출하고, 이를 근거로 상대의 주장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글을 서술해나가고 있는 셈이다.

  

   나는 리케르트의 책을 읽으며 그의 주장에 상당 부분 수긍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케르트의 글과 같은 양식의 서술이 얼마나 과학자들의 활동에 부합하며 더 나아가 과학적 지식에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구심이 들었다. 칸트, 리케르트와 같이 순수한 개념 분석에 상당 부분 의존하며 서술할 수 있기는 하다. 반면 라이헨바흐와 같은 논리경험주의자는 과학의 구체적인 지식과 훨씬 더 밀접한 방식으로 서술한다. 라이헨바흐의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 분석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와 같은 철학적 과학자들의 서술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실질적인 물리학적 지식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논리경험주의 이후의 과학철학자들이 쓴 글들에서는 예전만큼의 진지함과 깊이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느낌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라 이를 쉽게 일반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주 간략하게만 나의 직관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칸트는 매우 개념 분석적인 방식으로 글을 썼다. 신칸트학파는 칸트의 입장을 좀 더 광범위한 각종 문화 현상들을 분석하는 데 활용했지만 그 분석이 충분히 세밀하지는 않았다. 20세기 전반기의 철학적 과학자들과 논리경험주의자들은 과학의 실질적 지식과 아주 밀접한 방식으로 글을 썼다. 그러나 논리적 분석에 치중한 논리경험주의, 그리고 그 이후의 과학철학은 진지함과 깊이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과학철학은 협소한 영역 내에서 전문화되었고, 이에 따라 조금씩 과학자들도 과학철학에 흥미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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