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역사적 관점의 장점과 위험

강형구 2016. 5. 22. 07:27

 

 

   토머스 쿤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정동욱 역)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개념들을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두 저서 사이의 관계는 더욱 각별하게 여겨진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체계는 헬레니즘 시대에 등장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전통을 상당 부분 유지하면서도 그에 비견될 정도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천문학 체계였다. 비록 천문학 외적인 요소들이 상당 부분 개입하고 그런 외적 요소들이 천문학 체계 자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상당부분 기여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천문학 체계가 존재했고 그 체계가 세계에 대한 관측 자료들과 잘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천문학은 고도로 정교화 된 개념 체계였고, 하나의 장대한 전통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에게는 늘 무엇인가에서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이 뽀로로 프로그램을 열광하면서 보는 것, 사람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열심히 보는 것, 부모님들이 자식들의 장래를 걱정하며 보살피는 것, 청년들이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것 등에서 그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역사를 읽는 것이 그런 의미 부여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대학에서 철학, 그 중에서도 과학철학을 전공했던 내게는 과학의 역사를 읽는 것이 내 삶의 나침반 비슷한 역할을 했다. 나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서양의 자연과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지만, 나는 나의 재능이 그러한 열망을 채워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처지와 비슷한 사례를 나는 서양과학의 역사에서 보았다. 그리스를 무력으로 지배했던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에서 이룩된 철학과 자연과학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인들 역시 이슬람을 통해 보존된 철학과 자연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대적인 번역 작업을 벌였고 이 번역 작업을 근거로 서양의 문화는 바뀌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전통 아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조금씩 소화되었으며 자연과학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진행되고 심화되었다. 서양 역시 자연과학이라는 하나의 문화를 아주 천천히 소화하고 극복한 후 끝내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역사 속에서 읽으며 일종의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과거의 사실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한 시대에 속하는 인간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시대 속에서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내 삶을 위한 지침을 제공해줄 수 있겠지만, 내가 언제까지나 역사를 이해하고 비평하는 제3자의 입장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모든 사람이 역사 속의 위인이 될 수는 없다. 아마도 나 역시 그러할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내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나의 소임은 무엇일까?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보편적인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사람은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천할 수 있을 뿐이다. 무술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무술가들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가 또 다른 한 명의 위대한 무술가가 되고자 노력한다. 음악가, 미술가, 체육선수, 소설가, 영화감독 등 다른 직업들도 마찬가지다. 역사학자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역사를 읽는다. 역사를 통한 성찰이 자신을 역사로부터 벗어난 비판자의 입장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스스로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의미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역사적 존재이고 역사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사실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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