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구획주의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

강형구 2016. 5. 4. 06:23

 

구획주의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

 

1. 여는 말 : 포퍼-쿤 논쟁, 무엇이 문제인가?

2. 라카토슈의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과학사의 합리적 재구성

3. 톨레미 프로그램에 대한 코페르니쿠스 프로그램의 대체 : 쿤 대 라카토슈·자하르의 분석

4. 로렌츠 프로그램에 대한 아인슈타인 프로그램의 대체 : 섀프너밀러 대 자하르의 분석

5. 구획주의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 : 어떤 의미에서 전진적인가?

6. 맺는 말 :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의 의의와 가능성

 

1. 여는 말 : 포퍼-쿤 논쟁, 무엇이 문제인가?

 

   1934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포퍼의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는 도전적인 저작이었다. 그가 겨냥한 것은 당시의 지배적인 철학적 운동인 논리실증주의 운동이었다. 그는 두 가지 측면에서 논리실증주의의 방법을 문제 삼는다. 첫째, 과학적 지식의 본성은 언어적 분석의 방법으로는 밝혀지지 않는다. 둘째, 철학적 인식론의 중요한 주제는 지식의 성장 문제인데, 논리실증주의의 방법으로는 지식의 성장을 밝힐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귀납이 아닌 반증(가능성)’을 지식의 본성과 성장을 판단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도입한다. 과학적 지식을 비과학적 지식과 구획짓고, 지식의 진보와 퇴보를 정의내리려 한다는 점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과 포퍼 모두 구획주의에 속한다. 하지만 귀납을 과학적 지식의 정당화의 근본적 토대라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포퍼와 대립한다. 라카토슈의 표현을 빌면, 카르납으로 대표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신고전적 경험주의에 속하며, 반면 포퍼와 그의 학파는 비판적 경험주의에 속한다.

  

   지식의 본성과 성장에 대한 인식론에 있어 포퍼는 역사적 방법의 중요성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주어진 문제에 관해 무슨 생각을 했고, 또 뭐라고 말해 왔는지... 그들이 왜 그 문제들과 대결해야 했는지, 그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정식화했는지, 그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했는지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지식의 본성과 성장에 대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포퍼의 비판적 경험주의는 가설들의 발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역사상 성공적인 과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가설을 제기했는지 또 그 가설이 어떤 방식으로 지식의 지위를 얻었는지에 초점을 맞춰, ‘과학적 발견의 과정을 평가할 수 있는 논리적 방법을 수립하려 한다. 포퍼가 생각하는 이러한 논리적 방법이 바로 반증가능성이다. 한 이론이 잠재적 반증자를 갖고 있고 그 이론의 평가자가 규약주의자의 술책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 그 이론은 반증가능하다.

  

   카르납과 포퍼의 대결은 구획주의라는 동일한 방법론적 범주 안에서의 대결이었다. 당시 카르납은 그의 신고전적 경험주의의 입장을 근거로 귀납적 논리의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시키고 있었으며, 포퍼는 이런 카르납의 시도를 꾸준히 비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학철학적 논의의 방향과 흐름을 변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이 등장한다. 1957년에 과학사적 연구를 근거로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출판한 바 있는 토머스 쿤은, 1962년에과학혁명의 구조를 출판하고 이는 20세기 과학철학에서의 가장 중요하고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자신의 책의 서론을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시작한다. “만약 역사가 일화나 연대기 이상의 것들로 채워진 보고(寶庫)로 간주된다면, 역사는 우리에게 지금 주어져 있는 과학의 이미지에 결정적인 변형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포퍼 또한 과학철학에 있어서의 과학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더라도, 쿤이 과학철학적 논의에 과학사를 도입하고 그 결론을 도출한 방식은 포퍼에 비해 더욱 급진적이고 새로운 것이었다.

  

    포퍼는 과학적 지식의 성장이 합리적 토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믿었고, 그러한 신념을 전제로 과학사를 보았으며, 그에 적합한 과학사적 사례들을 자신의 논의에 도입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례들을 근거로 자신의 반증가능성의 논리를 수립했다. 따라서 포퍼의 반증주의 논의는 두 가지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첫째, 포퍼가 자신의 논의를 위해서 도입한 과학사적 사례들이 실제의 과학사적 맥락과 부합하는가? 둘째, 포퍼의 반증가능성의 논리 그 자체가 논리적으로 타당한가? 포퍼에 대한 쿤의 중요한 문제 제기는 위에서 제시한 첫 번째 관점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쿤에 의하면, 대개 이론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현행 과학이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과학자 자신의 능력이 비난을 받게 되며, 포퍼가 말하는 반증은 어떤 과학의 전문분야에서 매우 특별한 상황 하에서만 간헐적으로 발생하여 왔던 것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그는, “과학에로의 전환을 특징짓는 것은 비판적 논의에 대한 포기임이 분명하다고까지 주장하며 포퍼의 합리적 토론개념을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포퍼의 반증주의가 실제 과학의 역사와 부합하지 않다는 쿤의 평가는 합당하지만, 과학적 지식을 평가하는 포퍼와 쿤의 기본적인 입장은 확연하게 다르다.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의 위기가 왜 도래하고, 그러한 위기 속에서 과학자들이 어떻게 연구를 수행하며, 어떻게 과학자들이 패러다임 교체라는 전향을 하게 되는지는 역사적 혹은 논리적인 방법으로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교체는 심사숙고와 해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게슈탈트 전환과 같은 비교적 돌발적이고 비구조적인 사건에 의해서 끝을 맺는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의 본성, 정상과학 및 패러다임 교체의 본성을 밝히기 위해서 우선 책임이 있는 집단 또는 집단들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라카토슈의 표현을 빌자면, 과학적 지식의 진보 또는 퇴보를 결정하는 보편적인 기준은 없으며, 우리는 다만 누가 또는 어떤 집단이 전문가 집단에 속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쿤의 입장은 구획주의가 아닌 엘리트주의에 속한다.

  

2. 라카토슈의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과학사의 합리적 재구성

 

   과연 포퍼의 비판적 경험주의의 입장은 과학사에 기반한 쿤의 공격으로 무너진 것일까? 만약 쿤이 순수한 과학사가의 입장에서 포퍼의 논의를 비판하고 과학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면, 포퍼는 과학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의를 수정하고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쿤의과학혁명의 구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차원의 논의가 맞물려 있다. 첫째, 쿤은 통시대적 관점에서 살펴본 과학사적 근거들을 토대로 자신의 주장을 지지한다. 이를 과학사적 차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쿤은 과학사적 근거들을 토대로 과학사라는 영역을 넘어서는 주장, 과학적 지식 및 과학혁명의 본성에 관한 주장을 한다. 이를 과학철학적 차원의 주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쿤은 자신의 과학철학적 결론을 근거로, 앞으로 추구되어야 할 과학철학적 방법론은 과학자 전문가 집단의 인지 과정 및 행동 유형에 대한 탐구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를 방법론적 차원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첫 번째 차원에서 쿤이 과학사에 부합하지 않는 포퍼 논의의 몇몇 측면들을 지적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근거로 포퍼가 쿤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차원에서의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포퍼적인 의미에서의 반증이 아주 드문 경우에만 일어났으며, ‘모든 이론은 논박과 함께 탄생한다는 쿤의 주장이 과학사와 일정 부분 부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과학의 역사 속에서의 모든 혁명이 정상과학’, ‘위기’, ‘패러다임의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쿤의 주장은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쿤 자신의 주장 역시 그 근거의 과학사적 정당성을 완전하게 입증하지 못한 상태다. 또한 만약 쿤이 자신의 방법론적 차원의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려 한다면, 그는 자신의 방법론을 근거로 한 연구를 진행시켜야 할 것이며, 그러한 연구 성과가 과학의 역사혹은 실제 과학의 실천과 합치함을 성공적으로 보여야 한다.

  

   포퍼가 주창한 비판적 경험주의의 중요한 기본 전제들을 유지하면서, 이를 과학사적 사료들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더 발전시키고 정교화시킨 인물은 라카토슈다. 라카토슈는 쿤의 역사적 도전을 받아들이고, 과학철학의 방법론이 지지되거나 반박되는 근거는 다름 아닌 과학사임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이제 과학사는 과학철학적 논의의 본격적인 전장(戰場)이 된 것이다. 라카토슈가 자신의 방법론을 전개하고 시험하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첫째, 쿤이 과학사에 근거해서 포퍼를 비판한 측면들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측면들을 보완시킨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해서 형식화시킨다. 둘째, 이렇게 개발된 방법론이 실제 과학사의 중요 사례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설명하는지 평가한다. 라카토슈에 따르면, “모든 방법론들은 역사서술적(또는 메타 역사적) 이론(또는 연구 프로그램)으로 기능하며 그리고 그러한 방법론이 가져온 합리적인 역사적 재구성을 비판함으로써 비판될 수 있다.” , 경합하는 다수의 방법론들이 있을 경우, 그 방법론들에 대한 평가는 각각의 방법론들이 제시하는 과학사의 합리적 재구성이 실제 역사와 제대로 부합하는지, 더 나아가 실제 역사를 잘 예측(더 정확히 말하면 후측)하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라카토슈에 의하면 구획주의의 진영에 속하는 모든 방법론들은 지식에 대한 합리성의 이론을 전제한다. 이때의 합리성이란, 지식이 진보하고 발전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이고 1차적인 요인은 객관적이며, 개인 혹은 집단적인 심리적인 상태나 우발적인 사건 등은 지식의 진보와 발전에 2차적이고 부차적인 역할 만을 담당함을 뜻한다. 이를 포퍼의 용어로 달리 표현한다면, “지식의 산물- 명제, 이론, 이론의 체계, 문제, 문제의 교체, 연구프로그램 등은 세 번째 세계내에서 살아가고 또 성장한다. 지식의 생산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세계에 살고 있다.” 이는 과학적 지식을 두 번째 세계’(의식, 신념의 세계)에서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쿤의 입장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이러한 차이를 라카토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합리적으로 재구성된 과학의 성장은 본질적으로 아이디어의 세계, 플라톤과 포퍼의 세 번째 세계’, 인식 주체와 독립되어 표현된 지식의 세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포퍼의 연구 프로그램은 이러한 객관적 과학의 성장에 대한 기술을 목적으로 한다. 쿤의 연구 프로그램은 (‘정상적인’) 과학자의 마음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기술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별 과학자의 마음- 심지어 정상과학자의 마음- 안에서 세 번째 세계의 거울 이미지는 보통 본래 모양의 희화화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 번째 세계의 원래 모습과 연결시키지 않고 이러한 희화를 기술하는 것은 희화의 희화를 결과할 것이다...

 

   라카토슈는 구획주의의 역사- 고전적 귀납주의, 확률주의, 규약주의, 반증주의,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 그 자체는 진보적 연구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으로 본다. 마치 톨레미의 프로그램을 코페르니쿠스의 프로그램이 대체하고, 로렌츠의 프로그램을 아인슈타인의 프로그램이 대체한 것처럼, 구획주의의 역사에서도 각각의 프로그램들은 서로 경쟁하며 과학사라는 근거를 토대로 진보적 프로그램이 퇴행적 프로그램을 대체해왔다는 것이다. 구획주의 내에서의 모든 방법론은 모든 과학의 역사들이 필연적으로 방법론적인 부담을 안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합리적 재구성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라카토슈에 따르면, 만약 쿤이 포퍼의 반증주의를 비판했다고 해도, 그는 구획주의의 동일한 범주 내에서 더 발전된 방법론인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 가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쿤이 과학사를 근거로 방법론을 평가하고자 한다면, 쿤은 정당하게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과학사와 자신의 방법론이 재구성하는 과학사 중 어떤 것이 실제 과학의 역사와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라카토슈가 제시하는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란 무엇인가? 그의 개정된 방법론적 반증주의는 포퍼의 반증주의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 “우리는 불가피하게 어떤 종류의 명제가 관찰명제여야 하고, 어떤 종류의 명제가 이론명제여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하고, “어떤 관찰 명제의 진리치와 관련된 결정은 피할 수 없다고 보는 점에서 라카토슈는 포퍼에 동의한다. 그러나 라카토슈는 시험은 이론과 실험 사이의 양자 대결이어야 하기 때문에, 최종적인 대결에서는 오직 이론과 실험이 대결한다고 생각한 포퍼와는 달리, ‘시험은 적어도 경쟁적인 이론들과 실험이라는 삼자 사이의 대결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이론과 실험 사이의 대결의 흥미로운 결과는 오직 (결정적) 반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가장 흥미로운 실험 결과 가운데 일부는, 명백히 반증이 아니라 입증임을 인정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과학 이론은 그 이론의 보조 가설, 초기 조건 등과 함께 평가되어야 하며, 어떤 종류의 변화가 발생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선행 이론과의 관계를 포함해서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물론 우리는 고립된 이론들이 아니라 일련의 이론들을 평가한다.” 이제 논의의 대상은 과학 이론이 아닌, 일련의 이론들로 구성된 연구 프로그램이다.

    

   모든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들은 그것들의 견고한 핵에 의해 특징지어질 수 있다. 프로그램의 부정적 발견법은 이 견고한 핵에 대해 후건 부정식을 적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대신에 우리는 보조 가설을 명확하게 하거나 발명하기 위해 창의력을 이용해야만 한다. ‘보조 가설은 견고한 핵 주위에서 보호대를 형성하며, 우리는 이 보호대에 후건 부정식을 향하게 해야만 한다. 이러한 견고한 핵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험에 정면으로 맞서거나, 조정하거나, 재조정하거나, 완전히 대치되어야 하는 것은 보조 가설이다. 만일 이러한 모든 것이 전진적인 문제 이동을 가져오면 그 연구 프로그램은 성공적인 프로그램이고, 퇴행적인 문제 이동을 가져오면 성공적인 프로그램이 되지 못한다.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부정적 발견법긍정적 발견법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정적 발견법이 견고한 핵에 후건 부정식을 적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하더라도, 해당 프로그램이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지 못할 경우 견고한 핵은 포기될 수 있다. ‘긍정적 발견법은 해당 연구 프로그램의 보호대 내에서의 반박 가능한 변항을 어떻게 바꾸고 발전시켜야 하는지, 만약 보호대의 일부 보조 가설들이 반박될 경우 어떻게 수정하고 정교하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와 암시로 구성되어 있다. 만약 연구 프로그램의 위와 같은 특성을 받아들인다면, 포퍼 식의 결정적인 반박과 결정적 실험은 하나의 이론 내에서는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어떠한 부정적 실험 결과도 연구 프로그램의 보호대를 수정함으로써 그 프로그램의 견고한 핵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로그램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교체되는가? 우리는 그 프로그램이 전진적인지 퇴행적인지의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카토슈에 따르면, “새로운 이론이 그 이전의 이론과 비교해서 경험적 내용이 더 풍부하면, 달리 말해 지금까지 기대하지 못했던 사실 곧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면, 이러한 이론들을 이론적으로 전진적인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덧붙여, “이론적으로 전진적인 일련의 이론들에 첨가된 경험적 내용 가운데 일부가 용인되었다면, 곧 새로운 이론이 예측한 새로운 사실이 실제로 발견되었다면, 그 이론을 경험적으로 전진적인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이론적 전진성경험적 전진성을 근거로 프로그램의 전진성과 퇴행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전진적이면서 경험적으로 전진적인 일련의 이론들을 전진적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퇴행적이다. 만약 보호대를 구성하는 보조 가설이 프로그램을 전진적으로 만들 경우 그 보조 가설은 적합한 것인 반면, 그렇지 않고 프로그램을 퇴행적으로 만들 경우 그 가설은 임시방편적인 가설이다. 한 연구 프로그램은 퇴행적일 수 있지만,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전진적 프로그램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거부되지 않는다.

  

   라카토슈의 방법론에서 등장하는 중요 개념들인 견고한 핵’, ‘보호대’, ‘전진성’, ‘퇴행성’, ‘임시방편성등은 그의 방법론이 과학사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생기와 형태를 얻고 그 타당성을 시험받는다. 따라서 뒤따르는 절에서는, 과학의 역사 속에서 잘 알려진 두 가지의 과학적 진보 사례(톨레미의 프로그램에서 코페르니쿠스 프로그램으로의 대체와, 로렌츠의 프로그램에서 아인슈타인 프로그램으로의 대체)를 라카토슈의 방법론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설명하는지를 살피고, 이를 통해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 갖는 타당성을 평가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타당성의 평가는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라는 하나의 방법론을 대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귀납주의, 규약주의, 반증주의 등 기타의 방법론들이 제공하는 합리적 재구성과 비교할 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본 논의에서는 쿤이 과학사적 근거를 토대로 포퍼의 방법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했음을 감안하여, 쿤이 제시하는 과학사적 근거를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 효과적으로 설명함을 집중적으로 보임으로써 이 방법론을 강하게 지지하고자 한다.

 

  

3. 톨레미 프로그램에 대한 코페르니쿠스 프로그램의 대체 : 쿤 대 라카토슈·자하르의 분석

 

   쿤의 저서코페르니쿠스 혁명1957년에, 그의과학혁명의 구조1962년에 출판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반면, 라카토슈와 자하르가 공동으로 집필한 논문왜 톨레미의 연구 프로그램은 코페르니쿠스의 연구 프로그램에 의해 대치되었는가1973년에 발표되었다. 쿤 방식의 과학사 해석을 비판하려던 라카토슈의 명백한 의도를 미루어본다면, 그리고 쿤의 저작들이 발표된 이후에 라카토슈가 구획주의적 전통에 속한 자신의 입장을 엘리트주의에 속한 쿤과 대비해서 분명히 할 수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라카토슈의 이후의 저작과 쿤의 이전의 저작을 동일한 수준에서 비교하는 것은 어쩌면 쿤에게는 부당한 것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가 톨레미의 체계를 잘 알고 있었고 아인슈타인이 로렌츠의 이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라카토슈가 쿤의 역사 서술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해서 그의 합리적 재구성이 쿤의 재구성보다 진보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재구성이 도달한 결과는 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며, 우리는 그의 재구성과 쿤의 재구성을 비교·평가할 수 있다.

  

   쿤은 자신의혁명4장에서 코페르니쿠스 프로그램이 등장할 수 있었던 사회문화적 배경을 설명한다. 서양에서 학문적 전통이 부활하기 시작하고, 고대의 천문학은 교회와 신학적 전통에 적합한 방식으로 복구된다. 천문학의 복구 및 연구로 인해서 톨레미 천문학의 단점이 밝혀지지만, 쿤은 단순히 톨레미 천문학의 내적 결점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시대의 사회가 보여주는 혁신과 개혁의 분위기, 대항해와 탐험의 성행, 지도 개량 및 천체에 대한 지식 증가, 달력 개혁의 필요성, 인문주의적 정신 및 신플라톤주의 등장 등을 중요한 외적 배경들로 꼽는다. 뒤이은 5장에서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 장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톨레미의 체계에 비해서 우월하다고 할 수 있는 여러 사항들을 상세히 설명하면서도, 단지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객관적 우월성 때문에 이 체계가 톨레미의 체계를 대체했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코페르니쿠스가 아닌 케플러에 의해서 완성된다.

 

  『혁명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쿤의 생각은, 이후 그의 저서구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비록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톨레미의 체계에 비해 몇몇 측면들에서 우월했음에도 불구하고(‘경쟁 패러다임의 상대적 능력’), 패러다임 사이에는 통약 불가능한 관계가 성립하므로 그 두 패러다임을 완전하게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대신 이 때 적절한 것이나 심미적인 것에 대한 개인의 감각에 호소하는 논증들”, “심미적 고찰의 중요성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혁명에서 제시한 코페르니쿠스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들은구조에서 패러다임 교체 이전의 위기 상황으로 재해석되며, 이 위기에 맞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소수 과학자가 가진 개인적이고 불분명한 심미적인 고찰이었다. 물론 쿤은 이전의 패러다임에 비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효과적인 문제 풀이 능력을 보인다는 것, 이전의 것이 해결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을 새로운 것이 해결한다는 것, 또한 패러다임의 정확성은 과학자 사회로부터 아주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 등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톨레미의 체계를 대체했는가에 대한 결정적인 기준을 합리성에 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그러한 기준 설정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라카토슈는 자신의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에 근거해서 순수한 내적 분석을 시도한다. 톨레미의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피타고라스적, 플라톤적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의 발견법은 모든 천문학적 현상은 가능하면 적은 수의 일양적인 원운동의 결합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이다. 피타고라스적, 플라톤적 프로그램의 초기에서는 우주의 중심이 어디인가에 대한 지시를 하지 않지만,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발전과 더불어 지구 중심 가설은 톨레미 프로그램의 견고한 핵에 속하게 된다. 에우독소스는 동심천구이론을 제안하지만, 이는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지도 못했고 천체에서 관측되는 여러 변칙 사례들을 해결하지도 못했다. 이에 아폴로니우스, 히파르쿠스, 톨레미 등은 이심원, 주전원, 대심을 사용하여 변칙 사례들을 해결하지만, 이는 톨레미 프로그램의 본래적인 발견법과는 어긋나는 것이었으므로 임시방편적인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프로그램도 피타고라스적, 플라톤적 프로그램이라는 측면에서는 톨레미의 프로그램과 동일했다. 다만 코페르니쿠스는 톨레미의 프로그램이 갖는 여러 난점들(발견법을 어기고, 항성 천구에 서로 다른 불규칙한 운동을 부여하며,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성이 물리학의 제 1준거틀을 제공한다는 것(태양중심설)을 견고한 핵으로 삼아 자신의 프로그램을 발전시킨다. 코페르니쿠스의 프로그램은 세 가지 측면에서 톨레미의 체계보다 우월했다. 첫째, 코페르니쿠스 프로그램은 기존의 발견법을 비교적 (톨레미의 체계와 비교했을 때) 충실히 따랐다. 둘째, 코페르니쿠스의 프로그램은 당시에 알려져 있는 천체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톨레미의 프로그램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셋째, 코페르니쿠스의 프로그램은 그 이론 내적인 측면에서 금성의 식 현상항성의 연주시차라는 이론적인 예측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코페르니쿠스의 프로그램은 이론적으로 전진적이었다.

  

   라카토슈에 의하면, 비록 코페르니쿠스의 프로그램이 이론적으로 전진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1616년에 이르기까지 성숙한 혁명을 달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161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코페르니쿠스 프로그램이 이론적으로 예측했던금성의 식 현상이 망원경에 의해서 관측되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경험적으로 전진적인 프로그램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왜 1616년 이전의 몇몇 천문학자들(케플러, 갈릴레오)이 톨레미의 프로그램이 아닌 코페르니쿠스의 프로그램을 추구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이 문제는 자하르가 사실의 새로움에 대해서 새롭게 정의하면서 해결된다. 라카토슈가 경합 관계에 있는 이론이 금지한 예측을 새로운 예측이라 한 반면, 자하르는 한 프로그램이 의도하지 않게, 오직 그 프로그램의 견고한 핵과 발견법만을 토대로 기존에 알려진 현상을 설명한다면, 이 현상은 그 이론에 대한 결정적인 경험적 지지가 된다고 재정의함으로써, 1616년 이전의 코페르니쿠스 프로그램이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전진적인 프로그램이었음을 보여준다.

  

   ‘천체는 태양을 둘러싸고 동심원 상에서 일양적인 운동을 하며,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주전원 상을 운동한다는 것을 중심 가설 A라 부르자. ‘내행성은 지구보다 짧은 주기를 가지며, 외행성은 지구보다 긴 주기를 가진다는 것을 보조 가설 B라 부르자. 보조 가설 B의 경우에는 당시 톨레미의 프로그램과 코페르니쿠스 프로그램 둘 다 인정하고 있었다. AB를 결합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첫째, 행성은 정지하고 역행한다. 둘째, 외행성의 공전 주기는 지구에서 보았을 경우 일정하지 않다. 셋째, 만일 천문학자가 지구를 고정된 구조의 원점으로 여긴다면, 그는 복잡한 운동을 각각의 행성에게 부여할 것이다. 복잡한 운동 가운데 하나가 태양의 운동이다. 넷째, 내행성의 이각은 한정적이며, 행성의 (계산된) 공전 주기는 태양과의 (계산 가능한) 거리에 따라 증가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떨어진 거리를 계산하고, 이를 근거로 태양계의 절대적인 크기를 결정할 수 있다. 위에서 제시된 네 가지 사실들은 톨레미 체계에서는 임시방편적으로만 설명되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프로그램은 톨레미 프로그램에 비해 이론적이고 경험적인우월성, ‘객관적인 과학적 우월성을 이루어냈다.

  

   비록 역사적 사료의 내용에 대한 평가의 측면에서 쿤과 라카토슈·자하르가 많은 부분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코페르니쿠스 업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제시하는지의 여부에 있어 두 입장은 결정적인 차이가 난다. 라카토슈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서 쿤에게 그렇게 소중했던 르네상스 정신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종교개혁과 반종교 개혁의 혼란, 성직자의 영향이 차지할 자리도 없다. 16세기 추정상 또는 실제의 자본주의 발흥이 야기한 영향의 흔적도 없다... 외부적 역사는 단지 2차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의 불필요하다.”이것은 과학사 서술에서 과학철학이 1차적이고, 과학사회학과 과학심리학이 2차적임을 의미한다... 철학적 질문이 내부적인’ ‘과학사의 합리적 재구성의 중요 요소이다. 철학적 질문 없이는 충분한 역사가 서술될 수 없다.”역사가들의 문제는 그의 방법론(말하자면, 평가 이론)에 의해 결정된다... 제시되는 심리학적 보조 가설은 평가에 대한 규범적인 이론에 따라 변할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라카토슈·자하르의 합리적 재구성은 쿤의 그것보다 뛰어난가? 만약 뛰어나다면 어떤 점에서 뛰어난가? 기존에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과의 합치 여부에 있어서, 라카토슈·자하르의 재구성은 쿤에 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라카토슈·자하르는 역사에 대한 쿤의 역사가적 해석부분을 제외한 부분들을 자신들의 재구성의 범위 안에서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역사적인 세부 사실들의 정확성, 풍부함이라는 측면에서 두 입장을 평가한다면, 쿤의 재구성이 라카토슈·자하르의 재구성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프로그램이 톨레미의 그것에 비해 심리적인 차원을 넘어 객관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사례가 보여주는 과학적 진보를 설명함에 있어서 라카토슈·자하르의 설명이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또한 쿤의 입장은 라카토슈·자하르의 주장보다 모호할 뿐만 아니라, 포퍼의 용어를 빌자면 반증가능하지도 않다.’ 라카토슈·자하르는 두 프로그램의 발견법이 무엇인지, 무엇을 견고한 핵으로 두었는지, 무엇 때문에 이론적이고 경험적으로 전진적인지를 명시하기 때문에 과학사를 근거로 반박될 수 있는 반면, 쿤의 주장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4. 로렌츠 프로그램에 대한 아인슈타인 프로그램의 대체 : 섀프너밀러 대 자하르의 분석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쿤의 저작이 라카토슈·자하르의 저작보다 먼저 출판되었다면, 라카토슈의 방법론을 근거로 아인슈타인의 프로그램을 분석하는 자하르의 논문은 뒤이어 밀러를 비롯한 다수의 과학철학자·과학사학자들의 비판과 옹호를 불러 일으켰다. 이 논문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라카토슈의 방법론을 진전시키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과학적 진보에 있어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 상대성이론의 등장을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을 토대로 성공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이 방법론의 가능성을 공고히 했다. 둘째, 이전까지는 단지 임시방편적이었다고 평가되던 로렌츠의 프로그램을 추구하는 것이 1915년 이전까지 충분히 합리적이었음을 보임으로써, 그런 의미에서 1905년 이후에도 로렌츠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진전시키려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구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옛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물리학자들은, 개종의 경험을 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새로운 세계에 살아갈 수 없다는 심리적인 설명으로 로렌츠의 사례를 설명해야 하는 쿤의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다.

  

   자하르는 자신의 논문에서 우선 마이켈슨-몰리 실험에 대해 설명하고, 이 실험 및 로렌츠와 아인슈타인의 프로그램에 관련된 기존까지의 설명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보인다. 이후 그는 로렌츠의 프로그램이 어떤 의미에서 합리적이었는지를 보이기 위한 예비적 작업을 수행한다. 그에 의하면 로렌츠 프로그램의 견고한 핵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전자기장에 대한 맥스웰 방정식. 둘째, 뉴턴의 세 가지 운동 법칙. 셋째, 시공간 좌표계에 관한 갈릴레오 변환(이에는 이른바 로렌츠 힘이 포함된다). 이 프로그램의 발견법(형이상학적 원리)은 다음과 같다. ‘모든 물리적 현상은 에테르를 통해 전달되는 작용에 의해 지배된다.’ 이어서 자하르는 로렌츠 프로그램에 포함되는 일련의 이론들

을 제시하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이 이론들은 모두 위에서 제시된 견고한 핵발견법을 공유한다고 가정한다).

 

: (1) 움직이는 시계는 지연되지 않고, (2) 에테르를 움직이는 측정막대는 수축하지 않는다.

:

에서의 (2)번 항목을 로렌츠-피츠제럴드 수축(LFC)으로 대체한다.

:

에서의 (1)번 항목을, ‘움직이는 시계는

의 요소에 따라 지연된다로 대체한다.

  

   자하르는

,

로의 이동 모두 임시방편적인 것이 아님을 보이고자 한다. 그것을 보이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그는 임시방편성의 세 가지 뜻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를 통해 새로운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 경우.

: 새로운 결론이 도출되었다 하더라도, 그 결론이 입증(혹은 부정적 결과)을 산출하지 않는 경우.

:

이 해당 프로그램의 긍정적 발견법과 부합하지 않는 보조 가설들과 결합하여

를 도출했을 경우. 그리고 그는 사실의 새로움을 새롭게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가설이 구성된 것과 관련된 문제 상황에 속하지 않은 경우에만 어떤 사실은 새로울 수 있다.” 포퍼는 위에서 제시된

를 임시방편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그륀바움이 밝힌 것처럼)

는 마이켈슨-몰리 유형과는 다른 유형의 실험(케네디-손다이크 유형의 실험)으로 입증이 가능하므로 임시방편적인 것이 아니다. ,

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LFC

,

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일까? 이를 보이기 위해 자하르는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다음의 주장을 한다. 로렌츠는 분자간 힘이 전자기력과 유사하게 작용하고 변형된다는 가설(이를 MFH라 하자)로부터 LFC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MFH는 별도로 입증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로렌츠 프로그램의 발견법과도 일치했으므로, 이는

,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결론을 내리자면, 로렌츠의 프로그램은 기존의 평가와는 달리 임시방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자하르는 1892년 이래로 로렌츠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진보했는지를 살핀다. 자하르에 의하면, 로렌츠가 추구한 대응상태이론(The Theory of Corresponding States)’은 끝내 맥스웰 방정식의 완전한 공변(covariance)을 수립하는 데에 실패했다. 이러한 어려움은 국소 시간에 대한 로렌츠의 물리적 해석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일반적인 역학적 고려에서 출발하는 아인슈타인의 접근 방식이 로렌츠의 접근 방식보다 탁월함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아인슈타인이 모든 물리적 법칙들과 개별 전자기 이론에 로렌츠 공변의 조건을 부여하기 전에 자신의 역학을 선별(sort out)한 반면, 로렌츠는 전자기학을 거쳐서 새로운 역학에 도달하기 위해서 고통스럽게 투쟁했던 것이다.” 따라서 1915년 이전까지의 로렌츠 프로그램은 이론적이고 경험적인 진전의 측면에서 아인슈타인의 프로그램에 뒤지지 않았으며, 다만 발견법적인 측면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프로그램이 소수의 과학자들로부터 수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프로그램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어떤 이유에서 로렌츠의 프로그램을 앞지를 수 있었는가? 자하르가 제시하는 아인슈타인의 발견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론들은 내적 정합성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 과학은 정합적이고, 통합되고, 조화롭고, 단순하고, 유기적으로 완결된 세계상을 제공해야 한다. 둘째, 대칭적인 관측적 상황을 심층적 대칭성이 표명된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론은 대체되어야 한다. 자하르에 따르면, 특수 상대성이론(SRT)은 위의 발견법을 따라 고전역학과 전자기학 사이의 비대칭성을 제거하는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를 전기동역학을 포함하도록 확장시킴으로써 이론적 비대칭성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상대성원리’(이를

이라 하자)가 당시 물리학적 실험 결과들과 잘 합치하는 원리였다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상대성원리에 비해 낮은 차원의 성격을 띠며 실험 결과들로부터도 안정적으로 지지되지 않았던 광속 일정의 원리’(이를

라 하자)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를 자하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인슈타인의 실제 출발점은

가 아니라

(맥스웰의 방정식은 자연법칙을 표현한다)이었다.

를 함축하지만, 당시 아인슈타인은

가 미시 세계에 적용될 지의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대신

를 제시했다는 것이 자하르의 생각이다.

  

   자하르는 로렌츠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와 아인슈타인을 비교하면서 로렌츠와 아인슈타인의프로그램이 결과적으로 차이가 났던 것은 각각의 프로그램이 가진 발견법의 위력에서의 차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프로그램의 중심 가설, 항성이 물리학의 제 1준거틀을 제공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코페르니쿠스와는 다른 발견법, 천체의 운동은 태양 중심의 힘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은, ‘모든 물리 법칙에 로렌츠 공변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발견법을 적용시킴으로써 이후 로렌츠의 프로그램에 비해 더 생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무렵 에테르 프로그램의 긍정적 발견법은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이에 반해 아인슈타인의 발견법은 이후에도 그 위력을 발휘해서 플랑크로 하여금 뉴턴의 제 2법칙을 수정하게끔 했을 뿐만 아니라,

이라는 혁명적인 결과를 도출하고, 더 나아가 동일한 발견법 내에서의 프로그램의 추구를 통해 일반 상대성이론을 탄생시켰다. 이후 1915년에 이르러 일반 상대성이론이 수성 근일점 이동이라는 변칙 사례를 (로렌츠 프로그램에 반해) 훌륭하게 설명함으로써 로렌츠의 프로그램보다 경험적으로도 앞서게 되고’, 이는 궁극적으로 아인슈타인의 프로그램이 로렌츠의 프로그램을 대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아인슈타인 프로그램의 성공은 갑작스런 직관의 섬광이나 신비로운 통찰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패러다임 이동을 통해 과학혁명을 설명하는 쿤의 방식으로는 아인슈타인 프로그램의 성공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위와 같은 자하르의 합리적 재구성에 대해서 여러 저자들이 비판과 논평이 잇따랐고, 그 중에서도 섀프너와 밀러의 비판은 자하르의 재구성에 대한 핵심적인 비판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섀프너의 논문부터 살펴보자면, 그의 비판의 주된 초점은 자하르가 아인슈타인의 프로그램을 재구성함에 있어서 시간 측정 및 동시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마흐적인 재정의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해 자하르는 그의 1977년 논문에서, ‘상대성이론의 탄생에 있어 마흐의 실증주의적인 태도가 실질적으로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응수한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달리 아인슈타인은 고전적인 실재론자였으며, 만약 아인슈타인이 실증주의의 옹호자였다면 상대성이론은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자하르의 대답이다. 두 사람의 주장 중 어느 주장이 옳은지에 대해서 완전히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을 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첫째, 섀프너의 주장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의 주장은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의 해석틀 속으로 포섭될 수 있다. 둘째, 섀프너에 대한 자하르의 대응은 철저히 과학사적 자료를 근거로 한다. 따라서, 이후의 과학사적 탐구를 통해서 자하르의 주장은 검사되거나 반박될 수 있다.

  

   둘째로 자하르에 대한 밀러의 비판을 검토해보자. 밀러는 자하르의 합리적 재구성을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밀러에 의하면, 과학사의 합리적 재구성은 “..적합한 역사적 맥락에서 관련된 과학적 문헌을 제시하고 그 내적 구조를 밝혀야 한다. 자하르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자하르는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의 구조에 맞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 자하르의 임시방편성은 그 자체가 임시방편적이다.” 밀러에 의하면, LFC를 고안할 1892년 당시 로렌츠는 마이켈슨의 실험을 분명히 고려하고 있었으며, 로렌츠가 LFC를 제시하는 논문에서 MFH는 언급되지 않는다. 로렌츠는 LFC절망적인 물리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LFC가 시험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는 마이켈슨-몰리 실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아닐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LFC는 마이켈슨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임시방편적인 가설일 따름이며, MFH 또한 그러한 LFC의 그럴듯함을 지지하기 위해서 사후적으로 제시된 임시방편적인 가설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자하르는, 밀러가 로렌츠의 개인적인 심경을 근거로 LFC가 임시방편적이었다고 판단하는데 이의를 제기한다. 자하르에 의하면,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에서는 개인의 심경과 같은 외적 요소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으며, 해석상의 갈등에 있어 심리적 문제를 객관화시켜서는 안 된다. 밀러는 사실과 규범을 혼동했으며, 과학사 서술에 있어 합리적 재구성은 필수 불가결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과학사 재구성의 합리성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과학사에 대한 어떤 재구성도, 그것이 해당 사건에 대한 독립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는 외부적 요소에 대한 호소를 최대한 줄이는 경우, 합리적이라 불릴 수 있다.” 자하르에 의하면 특정한 합리적 재구성은 다른 합리적 재구성에 비해서 합리적일 수 있으며, 이어서 그는 자신의 합리적 재구성이 밀러의 그것보다 더 뛰어남을 보이고자 한다. 그는 역사적 근거를 들어 MFH가 임시방편적이지 않았음을 보이고, 더 나아가 로렌츠가 MFH를 토대로 LFC를 도출한 사실 역시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밝힌다. 뒤이어 자하르는 밀러가 자신의 주장을 위해 로렌츠 논문의 일부를 소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밀러 또한 자신의 주장을 위해 과학사를 왜곡했다고 밀러의 비판을 되받아친다.

  

   과학사에 대한 논증의 궁극적인 근거는 과학사에서 찾을 수밖에 없고, 과학사적 사료에는 항상 해석의 여지가 개입되기 때문에 자하르와 밀러의 논쟁에서도 누가 옳고 그른지를 완전히 중립적으로 판단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첫째, 자하르의 주장은 과학사적 근거에 기반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주장이나 심리학적 주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의 주장은 철저히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라는 철학적 방법론의 범주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둘째, 비록 밀러가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자하르의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하더라도, 그가 역사를 해석하는 철학적 방법론을 자하르의 수준으로 정교화하고 분명하게 하지 않는 이상, 철학적 방법론을 근거로 한 과학사의 합리적 재구성은 자하르의 것이 밀러의 것보다 더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5. 구획주의적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 : 어떤 의미에서 전진적인가?

 

   모든 역사적 서술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한 관점의 철학적인성격은 해당되는 역사 서술의 특성에 따라서 표면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종류의 역사도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 그와 동시에 역사 서술의 토대가 되는 철학적 방법론을 선택하는 문제또한 피할 수 없게 된다. 특정한 철학적 방법론이 역사 자체를 변형하고 왜곡시켜 해석할 여지는 항상 존재하지만, 그러한 변형과 왜곡의 여부는 다시금 역사로부터 평가받아야 한다. 역사를 해석하는 완벽한 철학적 방법론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해당 방법론이 비판과 오류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고 그에 따라 그 자신의 철학적 기준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스스로를 점차적으로 역사와 부합하게 만드는지의 여부는 중립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이 사실적인가’, ‘무엇이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있으며, 그러한 판단의 타당성은 상호주관적인 비판을 통해서 수정되고 정정된다.

  

   과학적 지식에 대한 비-역사적인 철학적 탐구가 과학의 역사 및 과학적 실천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1960년 이후로 꾸준히 제기되어 온 문제다. 만약 우리가 언제나 특정한 종류의 방법론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기존까지의 과학철학적 방법론이 어떤 의미에서 부적절했고 이를 이후 어떤 방식으로 발전시켜 나가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판단해야만 한다. 과학철학은 역사적 도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철학적으로답하기 위해 과학철학적 방법론의 역사 그 자체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우리는 과학철학적 방법론의 역사에 대한 어떤 방식의 합리적 재구성이 타당한지를 다시금 평가해야 하며, 그러한 평가의 기준은 철저히 과학철학의 역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라카토슈가 과학철학적 방법론의 역사에 대해서 쓴 일련의 논문들은 위와 같은 문제들에 그가 정면으로 대결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어떤 의미에서 전진적인가? 그것의 전진적인 성격은 과학철학 방법론의 역사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회의주의, 엘리트주의가 아닌 구획주의적 방법론의 범주에 속하며, 그 범주에 속하는 고전적 귀납주의, 확률주의, 규약주의, 반증주의,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그 자체로 방법론의 역사를 구성하며 구획주의적 방법론이 일종의 전진적 연구 프로그램임을 보여준다. 고전적 귀납주의에서 반증주의까지 이르는 모든 구획주의적 방법론은 과학의 역사에 근거해서 반증되었지만,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과학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하고 그 결과를 역사에 의해서 평가받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방법론들이 보여주었던 난점들을 극복한다.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과학적 지식의 형성과 발전이 지식 생산자의 심리적인 차원이 아닌 객관적 차원에 관련된다고 전제하며,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지식의 성장은 객관적인 기준을 통해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구획주의적 방법론의 범주에 속한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견고한 핵이며 중심적 발견법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 유일하게 전진적인 과학철학적 방법론인가? 우리가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 구획주의의 범주 안에서의 전진적 프로그램임을 인정한다고 해도, 회의주의와 엘리트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다른 전진적 프로그램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은가? 파이어아벤트로 대표되는 회의주의적 방법론의 경우, 그것이 전진적인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신념 체계가 다른 것들보다 더 옳다고 말할 수 없으며’, ‘과학적 이론들을 평가하는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기때문이다. 그러므로 회의주의에 속하는 방법론은 회의주의 그 자체가 표방하는 기준으로써만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는지의 여부조차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회의주의의 이러한 기준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완벽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 할지라도 지금껏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으며 상당히 믿을만하다는 우리의 건전한 직관과 상식에 위배된다. 회의주의적 방법론은 과학의 역사 및 현재의 과학적 지식이 보여주는 강력한 효율성을 통해 반증된다. 또한 회의주의는 그 자신의 기준으로 인해 스스로가 표방하는 주장들 자체의 타당성마저 보장할 수 없다. , 회의주의에는 내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다면 폴라니와 쿤으로 대표되는 엘리트주의적 방법론은 어떠한가? 엘리트주의의 방법론에 따르면, “만일 한 과학자(P)T라는 이론을 제시했다면, T의 인식론적 장점을 평가하기 위하여 엘리트주의자는 T를 만들어낸 사람, P가 진정한 과학자인가의 여부를 심사해야만 한다. 그는 다만 제작자(P)만을 심사할 뿐, 그 산물(T)을 심사하는 것은 아니다. T의 인정 및 용납은 P의 용납에 의한다... 이것은 심리학주의이다. 만일 기준이 개인이 아니고 집단에 적용된다면, 이는 사회학주의이다.” 심리학과 사회학의 방법을 과학철학에 접목시키면서도 과학철학 고유의 규범성을 유지하고 수정하려는 철학적 탐구는 쿤 이후 광범위하게 수행되어 왔다.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의 의사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 과학자 공동체에 소속되는 개별 행위자들이 복잡한 환경 하에서 기존에 습득한 다양한 수준의 개념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활용하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탐구가 과학적 지식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집단이 과학적이라고 인정될 수 있는가를 알기 이전에 무엇이 과학을 구성하는가에 관한 약간의 아이디어라도 가져야만 한다면 무엇이 과학적 진보를 구성하는가를 먼저 결정해야만 한다. 이런 규범적 문제가 해결된 후라야 과학적 발전을 위해 어떤 사회심리학적 조건이 필요한가 (또는 가장 선호될 수 있는가) 하는 경험적 문제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과학자 공동체에 대한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접근 방식을 취한다고 해도, 어떤 과학자 공동체의 어떤 측면을 탐구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대한 척도가 사전에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규범적인 판단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다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유능한 과학자 집단이라고 알려져 있는과학자 공동체를 연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선행되는 과학철학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과학사회학의 접근법과 문제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과학사회학이 규범내포적(normimpregnated)’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인 데 반하여, 과학철학은 규범적인 것이다.”

  

   우리가 엘리트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경험적 탐구를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에 선행하는 규범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내려지지 않는 한 그 탐구의 정당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과연 과학적 지식의 성장은 합리적인가? 그러한 성장의 합리성을 객관성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수립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문제들에 있어서 엘리트주의의 입장이 구획주의의 입장보다 더 적절한 해답을 제시한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엘리트주의적 입장에서 제시한 해답은, 그 논리적인 합당성에 있어서나 실제 과학사의 합치 여부에 있어서나 구획주의적 입장의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 제시한 해답보다 우세하지 않다. 라카토슈의 용어를 빌자면,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적어도 이론적으로 전진적이다. 그리고 이후 이 방법론에 의한 과학사의 합리적 재구성이 과학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추가적으로 분석하는 데 성공적으로 적용된다면, 이는 경험적 전진성또한 획득하게 될 것이다.

 

  

6. 맺는 말 :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의 의의와 가능성

 

   철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중요한 논쟁들이 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학철학적 논쟁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많은 과학철학자들은 -포퍼 논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대체 -포퍼 논쟁은 왜 문제였나? 쿤과 포퍼는 어떤 지점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는가? 만약 우리가 쿤-포퍼 논쟁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확인하지 않는다면, 이후 이 논쟁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식 또한 부적절할 수밖에 없다. 라카토슈는 이 논쟁을 철학적 방법론의 역사안에서 해석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부여하고, 포퍼의 입장과 쿤의 입장이 어떤 지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른지를 분명하게 밝힌 다음, 포퍼의 입장이 자리하고 있는 철학적 방법론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철학적 방법론의 역사에 대한 라카토슈의 합리적 재구성은 철학사를 이해하는 일관된 논리를 부여하며, 그 자체로 철학의 역사를 통해 평가받을 수 있다.

  

   라카토슈가 개발한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과학사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 방법론의 타당성을 과학사에 근거해 시험한다. 앞선 논의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 과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혁명들로 평가받고 있는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아인슈타인 혁명이라는 과학사적 사건들을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포퍼에 대한 쿤의 과학사적 비판을 극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이 방법론은 이후의 과학사 분석에 대한 토대 또한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포퍼의 방법론이 갖고 있던 이론적 난점들을 해결했다는 점에서, 과학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이에 대한 과학사적 시험을 견뎌냈다는 점에서,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이론적인 측면과 경험적인 측면 모두에서 전진적이다.

  

   “과학사가 없는 과학철학은 공허하고, 과학철학이 없는 과학사는 맹목이다라는 라카토슈의 유명한 말은, 쿤이구조의 서론에서 쓴 유명한 말과 더불어 이른바 과학철학의 역사적 전회와 함께 흔히 언급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전회 속에서 쿤과 라카토슈가 취한 철학적 입장의 차이는 분명하다. 라카토슈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 탐구는 쿤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 탐구와 경쟁한다.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은 그 방법론의 논리적 차원과 경험적 차원 모두에서 지금까지 그 타당성을 잃지 않았으며, 지금껏 알려져 있지 않은 과학사의 다양한 사례들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유연성 또한 갖고 있다. 이 방법론의 견고한 핵긍정적 발견법, 이후 과학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 성공적으로 자신의 보호대를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방법론과 더불어 여전히 객관적 지식의 성장, 그 성장과 관계된 합리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라카토슈·무스그레이브 편집, 조승옥·김동식 옮김,현대 과학철학 논쟁, 아르케, 2002.

임레 라카토슈 지음, 신중섭 옮김,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 아카넷, 2002.

임레 라카토슈 지음, 이영애 옮김,수학, 과학 그리고 인식론, 민음사, 1996.  

칼 포퍼 지음, 박우석 옮김, 과학적 발견의 논리, 고려원, 1994.

토머스 쿤 지음, 김명자 옮김,과학혁명의 구조, 까치, 20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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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 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 Harvard University Press,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