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배리 데인튼, [시간과 공간] 요약 정리 19: 상대성과 실재

강형구 2016. 4. 3. 05:49

 

19: 상대성과 실재

(Relativity and reality)

 

19.1. 한정되지 않은 실재

   현재가 우주 전체에 적용되며 절대적이기 때문에 생성 혹은 소멸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흐름이 이어진다고 보는 관점을 고전적 역동 모형(Classical Dynamic Model, CDM)’이라 부르자. 이는 동시성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특수상대성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 STR)과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에서는 CDMSTR 사이의 이러한 긴장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 또한 STR의 맥락에서 비고전적인 역동 모형이 가능한지의 여부를 검토해보도록 하자.

  

   민코프스키 시공간의 빛 원뿔 도식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대칭적이므로, 이 세계가 영원한 4차원 블록 같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STR에서는 현재와 현재가 아닌 것의 구분이 기준계의 선택에 의존하므로, 이 구분이 존재론적인 의의를 갖는 CDM과는 다르다.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 사건 E가 일어났다고 해보자. 지구 기준으로 E는 현재이지만 목성 기준으로는 E가 미래라고 해보자. 이때 이 사건이 지구에서만 실재하고 목성에서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이는, STRCDM 보다는 블록 우주 개념과 더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퍼트남(Putnam)과 리트딕(Rietdijk)1967년에 오직 블록 관점만이 STR과 양립가능함을 증명하고자 했는데, 이 증명을 살펴보자. 관계 R“~에 대해 실재함을 뜻한다. , Rxyx에 대해 y가 실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관계 R은 재귀성, 대칭성, 전이성을 갖는다고 하자. 시공간에 점 사건 E1, E2, E3가 있다. 두 개의 우주선 S1S2E1에서 만났다가 멀어진다. 그리고 E2, E3E1과 공간처럼 분리되어 있다. P1은 우주선 S1의 초평면이다. E2E1과 함께 초평면 P1 위에 놓여 있으므로 S1에 대해 동시적인 반면, E3S1에 대해 미래에 속한다. 만약 성장하는 블록 이론을 전제하면, S1의 관점에서 E1, E2는 실재적이지만 E3은 비실재적이다.

  

   이제 우주선 S2의 초평면을 P2라고 하자. 이 경우, E1E3은 동시적이나 E2E1의 과거에 속한다. R의 대칭성과 전이성에 의해, RS1E1, RS1E2, RS1S2, RS2S1, RS2E1, RS2E3... 따라서, RS1E3, RS2E2. 결과적으로, S1에게 E3은 실재하며 S2에게 E2 역시 실재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논의는 시공간의 모든 영역에 있는 점 사건들로 확장될 수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실재성을 특수한 시점으로 한정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퍼트남과 리트딕은 블록 이론이 아닌 성장하는 블록 이론이나 현재주의가 STR과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과연 퍼트남과 리트딕의 추론은 타당한 것일까? 이러한 추론에 대해서 반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실제로 퍼트남과 리트딕의 주장에 대해 두 종류의 대응이 제시되었다. 첫째 종류의 대응은 STR의 주요 원리들을 유지하면서 역동주의가 STR과 양립가능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찾으려 시도하는 입장이다. 둘째 종류의 대응은 표준적인 형식의 STR을 포기하면서 역동주의를 유지하려는 입장이다. 우리는 우선 첫 번째 종류의 입장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9.2. 양립가능주의(Compatibilism)

   스클라(Sklar)는 역동주의와 STR의 화해 지점을 찾았다. 스클라에 따르면, STR에서 동시성이 비전이적이고 기준계 상대적인 것처럼, 실재성 관계인 R 역시 비전이적이고 기준계 상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STR이 그 자체로는 블록 이론을 도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STR이 역동주의의 여러 판본들 중 특정 판본을 선호하지도 않음을 뜻한다. 그런데 실재성 관계를 비전이적으로 보면, 과거와 미래의 존재를 부정하는 현재주의의 경우 오직 지금 이 시공간 점만이 실재한다는 극단적인 유아론의 입장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양립가능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실재성 관계를 상대화시키지 않는, 스클라와는 다른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이제는 그러한 다른 입장을 제시한 슈타인(Stein)의 견해를 검토해보자.

 

19.3. 분절된 시간

   슈타인은 STR과 실재하는 생성 개념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음에 답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실재가 존재하게 되는 단계의 시공간적 본성은 무엇인가? 둘째, ‘확정된 것(definite)’결정되지 않은 것(not yet settled)’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슈타인은 이 두 가지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원리들 네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근본적인 구분자는 지금 여기이다. 둘째, b에서의 상태가 점 a에서의 상태만큼 이미 확정적이라면, b에 대해서 확정적인 모든 것은 점 a에 대해서도 확정적이다. 셋째, 모든 점 a에서의 상태는 a 그 자체에 대해 확정적이다. 넷째, 임의의 점 a에 대해, a에 대해 결정되지 않은 점들이 존재한다.

  

   슈타인은 점 x가 주어졌을 때 x의 인과적 과거에 속한 점들만이 x와 실재함의 관계인 R 관계를 맺고 있음을 주장했다. 따라서 과거 원뿔 밖의 영역에 속한 점들은 점 x에 대해 확정적이지도 않고 실재적이지도 않다. 만약 우리가 슈타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각각의 점들마다 이 점들에 대해 실재하고 확정적인 것이 달라진다. 따라서 이는 실재가 개별적인 점들에 의해서 분절화되는 효과를 낳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논의를 통해 슈타인이 민코프스키 시공간에서 객관적인 생성이 실제로 일어남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러한 가능성이 퍼트남의 주장처럼 배제되는 것은 아님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슈타인의 접근법에서 R 관계는 전이적이고 재귀적이지만 대칭적이지는 않다. ba에 대해 확정적이고 ba의 인과적 과거에 속한다고 해도, ab에 대해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ab의 인과적 과거에 속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슈타인의 입장은 논리적인 일관성을 갖고 있다. 이제 슈타인의 양립가능주의가 어떤 형이상학적 함축을 갖고 있는지를 좀 더 구체화시켜보자.

   

   슈타인이 말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실재의 부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오직 한 점에 상대적으로만 무엇이 실재하는지 말할 수 있을 뿐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슈타인의 입장을 시각화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보편적인 하나의 흐름이 아니라, 서로 상관되지 않고 그 수가 비가산적으로 많은 지류들이 흘러간다. 그리고 이 지류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 다시 분절된다.

  

   개별적인 세계선의 관점에서도 이 상황을 시각화할 수 있다. 시공간에 점 입자들이 흩어져 있다고 하자. 시간이 지나면서 입자들은 과거에 빛 원뿔을 남기는데 이 원뿔들은 점점 커진다. 이 때 점 입자들은 서로 동등하며, 입자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실재를 보게 되므로 입자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실재가 달라진다. 또한, 하나의 점 관점에서 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재하지 않았던 시공간의 점들이 실재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세계선이 자라면서 빛 원뿔의 시공간 영역 역시 점차적으로 확장된다. 이 그림에서 세계선을 구성하는 빛은 세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실재를 만들어내는 역할도 한다.

  

   슈타인의 입장을 조금만 변형시키면 현재주의에 부합하도록 만들 수 있다. 빛 원뿔 내부의 영역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빛 원뿔 표면만을 현재라고 간주한다. 이를 빛 원뿔 현재주의라고 부른다. 원뿔 현재주의는 직관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이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보는 것들은 과거가 아닌 현재에 속한 것들이고, 우리와 동일한 빛 원뿔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 역시 동일한 현재에 속하기 때문이다. 원뿔 현재주의의 비직관적인 특징들도 있다. 이 입장에서 현재라는 관계는 대칭성과 전이성을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또한 수십억 년 전에 일어난 일 역시도 현재라고 간주하게 된다는 단점도 있다.

  

   그러나 STR의 등장 이후 시간 간격과 공간 간격이 기준계 상대적임이 드러났으므로, 이러한 비직관적인 특징들은 빛 원뿔주의에 대한 큰 반론이 되지는 못한다. 원뿔 현재주의는 시공간 간격이 0인 사건들로 현재를 구성하는, 시공간에 대한 하나의 입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4. 절대적 동시성: 양자적 연결

   STR과 양립가능한 입장이 갖는 반직관적인 성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우주 전체에 공통되는,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 이 구분 기준은 현재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의 단점 2개가 있다. 첫째, 우주 공통적인 현재가 가능하려면 절대적인 동시성 관계가 성립해야 하는데, 이러한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순간 도달 신호가 경험적으로 발견되지 않았다. , 절대적 동시성을 지지하는 경험적 증거가 없다. 둘째, 상대론적인 경험적 효과들(시간 지연, 길이 수축 등)이 잘 입증된 상황이므로, STRGTR을 대체하는 이론 역시 상대론적 효과에 대해 그 고유의 용어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단점에 대응하여, 역동주의자인 툴리(Tooley)는 다음과 같이 STR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STR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STR을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관측 자료와 양립가능하다. 둘째, 사건들이 절대적인 동시성 관계를 만족하도록 한다. 셋째, 다른 측면들에서 STR보다 우월하므로 더 선호할만하다.

  

   툴리는 우리가 시공간에 대한 특정한 형이상학적 가정들을 할 경우, 사실상 STR의 틀 안에서 절대적 동시성이 정의될 수 있음을 보였다. 첫째, 시공간 점은 실체적 개체이며 이 점들의 합인 시공간도 실체적 개체이다. 둘째, 시공간 점들은 서로 인과적으로 연관될 수 있다. 셋째, 모든 시공간 점은 최소한 하나의 다른 시공간 점을 존재하도록 야기한다. 그리고 그 점은 다른 시공간 점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었다. 넷째, 인과적으로 연관된 시공간 점들은 같은 곳에서 발생한다. 다섯째, P, Q, R, S가 시공간 점이고, P의 존재가 Q를 유발하고, R의 존재가 S를 유발할 경우, PQRS는 평행하다.

  

   툴리는 절대적 공간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빛의 속도는 절대 공간에 대해서만 일정한 속도를 갖는 것으로 본다. 절대 공간이 있기 때문에, 두 사건이 절대 공간 기준으로 동시적이라면 두 사건은 절대적으로 동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툴리의 이론에서 빛은 서로 다른 관성계에서 다른 속도를 갖는다. , 관성계가 빛과 같은 방향으로 v의 속도로 움직이면 이 계에서 빛의 속도는 c-v이며, 빛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 빛의 속도는 c+v이다.

  

   이런 입장이 STR과 상치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빛이 L1에서 L2로 갔다가 L1으로 다시 오는 순환이동경로에서의 빛의 속도에 대해서만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 방향 경로에서의 빛의 속도가 일정함을 입증하는 경험적 자료는 없다. 따라서 툴리는 절대 공간에 대해서 움직이는 관성계들에서는 빛의 속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속도 차이가 감지되지 않는 이유를 제시했다. 툴리는 로렌츠 유형의 보정 이론을 제시했다. 이른바 ε-로렌츠 변환을 이용하면 관성계에서의 빛의 속도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위니(Winnie)는 이러한 수정된 이론이 STR 만큼이나 일관될 수 있음을 보였다.

  

   그러나 과연 툴리 식의 수정된 STR 이론을 수용해야 하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가? 이에 대해 툴리는 양자이론에서 자신의 이론에 대한 지지의 근거를 찾는다.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사물들 사이에서 순간적인 연결이 일어난다면, 그리고 그러한 연결을 경험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정지해 있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1935년에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은 양자역학이 자연에 대한 완결된 기술을 제공해주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양자역학에서는 입자들이 측정될 경우에만 확정적인 속성을 갖는다고 본다. 그런데, 서로 상관된 두 입자의 경우, 한 입장의 속성을 측정해서 확인하면 다른 입자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지 상관없이 다른 입자의 속성 또한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A 입자의 속성 aB 입자의 속성 b가 있을 때, a를 측정하면 b가 알려질 경우, B 입자의 속성 b는 측정 이전부터 b이었을까 아니면 측정과 동시에 순간적인 연관이 일어나서 b라는 속성을 갖게 된 것일까?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EPR)은 전자의 해석을 선호했다. 그래서 그들은 표준적인 양자역학을 완결되지 않은 이론이라고 보았다. 반면 툴리는 후자의 해석을 선호하여, 순간적인 연관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1964년에 실시된 벨 부등식의 실험, 1980년대 초에 실시된 아스페의 실험 등은 입자 AB가 측정 전에 확정적인 속성 ab를 가질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툴리 뿐만 아니라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 역시 비국소적이면서 특정 기준계를 선호하는 양자역학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모들린(Maudlin)은 공간 같은 연관에 대해서 아스페 실험이 밝힌 바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두 입자 사이의, 공간 같은 순간적인 연관은 빛보다 빠른 물질 혹은 에너지의 전달을 요구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이 실험이 빛보다 빠른 신호가 가능함을 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스페 실험은 빛보다 빠른 인과적 연관을 필요로 한다. 이는 빛보다 빠른 정보 전달이 있어야만 가능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양자역학을 민코프스키 시공간과 조화시키는 데는 많은 희생이 따른다. 로렌츠 불변성을 유지하고자 하면 역행 인과를 받아들여야 하고, 양자역학의 붕괴 이론 또는 봄의 이론을 받아들이면 로렌츠 불변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이 장에서의 논의를 요약해보자. STR은 시공간을 블록으로 보는 이론과 부합한다는 퍼트남의 주장이 틀리지는 않지만, STR이 오직 블록 이론과만 양립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번 장에서 우리는 시간에 대한 역동적 이론 역시 STR과 양립가능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특히 우리는 슈타인의 점 상대화된 역동주의, 원뿔 현재주의, 툴리의 수정된 STR 이론과 같이 시간에 대한 역동적 입장을 취하는 대안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