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철학적 전통 아래에서

강형구 2016. 3. 27. 17:35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나는 철학적 전통 아래에 속하는 사람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만약 그가 나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철학자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철학자라는 직업을 갖지 않고서도 철학적 전통에 속할 수는 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가 다시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철학적 전통 아래에 속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을 배웠고, 이를 입증하는 학위를 갖고 있다. 고등교육기관에서 얻은 학위는 내가 공식적으로 철학적 전통에 속하고 있음을 확인해준다.”

  

   만약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나 서당이나 서원, 성균관과 같은 조선왕조의 교육기관을 거치며 유학을 배웠다면, 아마 나는 유학의 전통 아래에 속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제 식민시기와 남북 분단을 겪은 후 근대화된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서구식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았다. 서양의 학문은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에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는 서양 학문의 여러 분과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적어도 그 선택은 나 스스로 할 수 있었다. 나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철학이라는 학문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나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나의 기질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이 인기 직업으로 부각되기 전부터 나는 공직에서 일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 증거가 몇 가지 있다. 대학 재학 시절 나는 사범대학으로 진학해서 교사로서 일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실제로 수학능력시험을 다시 본 적이 있다. 수학 교사나 물리 교사로 살아가면서 철학을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군대에 입대하기 전 공무원 시험용 책을 여러 권 샀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더라도 시민을 위한 일을 하면서 나의 사회적인 생존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대학 동기들 몇몇처럼 시민운동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중국 왕조의 하급관리로 일하며 도덕경을 썼던 노자, 법률가로서 수학을 연구했던 페르마 같은 사람이 내가 닮고 싶던 사람이었다.

  

   내가 속한 전통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 , 칸트, 헬름홀츠, 마흐, 푸앵카레, 아인슈타인, 러셀, 라이헨바흐, 카르납 등과 같은 사람들이 포함된다. 물론 나는 이런 위대한 사람들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위대함보다는 사고의 유형 혹은 방식에 초점을 맞추는 게 좋을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세계와 자연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자연을 이해하는 인간의 방법에 대해 세밀하게 비판하고 분석했던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수학자나 물리학자 혹은 생리학자라는 직업을 가졌을 수는 있으나, 이들의 사고방식이나 작업으로부터 철학적인 성격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사실 나는 수학자도 아니고 자연과학자도 아니다. 나는 21세기에 대한민국이라는 한 작은 나라의 정부 조직에서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한 명의 직원일 뿐이다. 다만 나는 세계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유서 깊은 사유의 전통 아래에서, 나의 능력에 맞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다. 독일어에 대한 아주 피상적인 지식을 갖고 있으며, 영어를 읽는 데는 큰 무리가 없고, 일상에서는 한국어로 말하고 쓰는 나는 주로 한국어로 작업을 한다. 내가 서양으로부터 우리 땅에 옮기고자 하는 것은 가장 최신의 과학적 정보가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고자 고대로부터 진행되어 왔던 서양의 철학적 사유가 갖는 전통과 힘이다. 철학적 사유가 갖는 힘과 깊이, 그것이 철학적 전통의 명맥을 지금까지 이어지도록 했다. 어린 소년이었던 나를 매혹시켜 이 전통의 일원이 되게 만든 것 역시 그러한 힘과 깊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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