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작품이 아닌 기록

강형구 2016. 3. 1. 20:44

 

   종종 나는 내가 학사과정과 석사과정을 거쳐 박사과정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게 해 준 대학에 감사한다. 공부와 관련해서 나는 퍽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운이 좋아 수학능력시험을 제법 잘 보았고, 대학원의 교수님들께서는 학부 성적이 좋지 않았던 나를 뽑아주셨다. 그런데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오직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이기적인 방식으로 공부했다. 학부시절 나는 공부를 적게 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강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문제는 내가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읽었고, 쓰고 싶은 글들을 썼다. 그래서 나는 수업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다.

  

   대학원에서도 비슷했다. 나는 논리경험주의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었다. 주변의 동료들은 이 주제가 이미 한물 간 주제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논리는 단순했다. 내가 지금껏 읽은 과학철학 문헌들 중에서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은 한스 라이헨바흐의 글들이었다. 그런데 라이헨바흐에 대한 연구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라이헨바흐에 대한 연구를 해야겠구나. 결국 나는 라이헨바흐를 주제로 삼아 나의 석사논문을 썼다.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1924년 저작을 토대로 쓴 논문이었다. 물론 나는 나의 석사논문이 뛰어난 논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석사논문 심사 절차를 통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한다.

  

   그 후 나는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논리경험주의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재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 때문에 대학원에 들어오지 못한 분에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게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능력에 맞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국의 논리경험주의 연구에 기여하자는 것이었다. 논리경험주의의 대표자로 모리츠 슐릭, 루돌프 카르납, 한스 라이헨바흐, 오토 노이라트, 칼 헴펠, 필립 프랑크 등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비엔나 학파보다는 베를린 학파에 관심이 있었기에 라이헨바흐를 좋아했고, 비엔나 학파 중에서는 물리학자이자 아인슈타인의 친구였던 필립 프랑크를 좋아했다. 프랑크보다는 라이헨바흐의 글들이 철학자답게 꼼꼼하고 체계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라이헨바흐를 집중 연구하기로 결정했다.

  

   아직까지 나는 라이헨바흐와 논리경험주의를 연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주제가 계속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논문을 쓰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재능을 가진 연구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기여를 하기 위해서 계속 연구한다. 나는 연구자이지만 직장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모든 시간을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전문 연구자들에 비해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구를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사소한 기여라고 해도, 아무리 내가 재능이 부족하다고 해도,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기여를 하면서 만족을 얻는다.

  

   박사과정 수료를 앞두고 있는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것이다. 아마 많은 박사과정 학생들은 야심을 갖고 자신들의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논문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남기기보다는, 그저 나라는 사람의 연구와 생각을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논문을 쓰고자 한다. 나는 무엇인가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쓰고자 욕심내지 않는다. 아주 조금씩 중요한 문헌들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길 것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1년의 시간을 두고 매일 조금씩 학위논문을 쓸 것이다. 나는 큰 욕심 없이, 그저 내 삶의 일관된 노력을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논문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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