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배리 데인튼, [시간과 공간] 요약 정리 09: 진공의 개념

강형구 2016. 3. 24. 07:04

 

9: 진공의 개념

(Conceptions of void)

 

    공간에 대한 실체론적 관점이 옳을까 관계론적 관점이 옳을까? 공간은 고유의 권리를 가진 대상일까 아니면 공간은 단지 물질적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진 그물망일 뿐일까? 공간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 달리 형이상학적 고려, 우리의 경험 구조에 대한 고려만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다. 따라서 과학적인 고려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9.1. 진공으로서의 공간

    공간의 진공 개념은 다음과 같다. 공간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자신의 내재적인 특질이 없으며, 단순한 부재이다. 사물들은 서로 다른 공간적 거리에 의해 분리될 수 있으며 이는 사물들 사이에 전달되는 신호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간 그 자체는 특징 없는 진공이므로, 우리는 공간의 크기를 직접적으로 측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공간의 영역에서 입자들과 장들(fields)을 없애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진공으로서의 공간은 외부적 한계를 갖지 않으므로 모든 방향에서 무한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공간은 무한하므로 오직 하나만 있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간은 무()이기 때문에 그 어떤 구조도 갖지 않을 것이다.

  

   이제 진공 개념에서 문제가 되는 2가지 측면들을 지적해보자. 이는 공간의 본성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만족시켜야 하는 2개의 기준을 제시해줄 것이다.

 

9.2. 보이지 않는 제약자(constrainer)

    2차원의 피조물들이 거주하는 2차원의 매우 얇은 평면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상상해보자. 이 세계의 주민들은 평평한 세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이 세계를 떠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들은 위, 아래라는 세 번째 차원의 존재에 대해서도 모른다. 논리적기하학적으로 4차원은 가능하다. 따라서 4차원에서의 3차원 존재인 우리들은 3차원에서의 2차원 존재인 평면 생물과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 공간의 진공 개념이 참이라고 가정해보자. 만약 공간이 진공이라면 공간에서의 운동의 가능성은 제한되지 않을 것이며, 공간의 차원 역시도 제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거시적 사물들은 3차원일 뿐만 아니라 사물들의 움직임의 가능성 역시 제한되어 있다. 공간에 대한 그 어떤 충분한 이론도 이와 같은 보이지 않는 제약들을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9.3. 연결의 문제(connection in question)

    사물들은 공간 속에서 움직이고 서로 충돌할 수 있다. 그리고 사물들은 빛이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의 경로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공간이 단순한 부재에 지나지 않는다면 공간적 연결의 가능성 자체 및 공간적 거리의 개념이 문제가 된다.

   

   다음과 같은 가상적인 상황을 생각해보자. 우주가 두 개의 공간적 장소들의 집합체인 S1S2로 구성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행성 행복마을(Pleasantville)’에 사는 사람들은 특정한 뿌리를 먹으면 죽었다가 부활하는데, 이 사람들은 뿌리를 먹고 또다른 행성 험한마을(Harshland)’에 갔다가 돌아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 험한마을행복마을과 동등한 수준으로 실재하며, 두 행성은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 분리된 공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에 대해, 두 행성은 공통의 4차원 공간에 포함되는 서로 다른 3차원 공간에 존재한다는 가설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가 없는 한 이 가설은 크게 쓸모가 없다. ‘행복마을거주민이 뿌리를 먹을 경우 시간 여행을 하게 되어 과거 혹은 미래에 존재하는 험한마을에 다녀오게 된다는 가설도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가설 역시 험한마을에 대한 실험과 조사를 통해 반박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시간 2공간 가설이 가장 단순하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사고실험이 말해주는 것은, 모든 사물들이 필연적으로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연장된 물질적 사물들이 직관적인 고체, 즉 공간의 부피를 꽉 채우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사물들 내에서는 두 점들이 연속적 경로로 연결되지만, 사물 O1O2 사이에는 부재만이 존재하므로 서로 연결될 수 없다. 각각의 사물들은 독자적인 세계다. 만약 복수의 서로 연결되지 않은 공간의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제안은 설득력을 얻는다.

  

   이는 우리의 세계에서 사물들이 서로 부딪치고 빛과 같은 신호들이 사물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혀 사소하거나 자명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공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사물들이 서로 연결되는 구체적 방법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

 

9.4. 실체론 :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

    실체론자는 제약과 연결의 문제를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호소력 있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이제 다음과 같은 유체의 세계를 생각해보자. 무한하고, 무한히 나누어지는 3차원의 액체 공간이 있다. 이는 마치 거대한 대양과도 같다. 이 세계의 지성적 거주자는 젤리 물고기다. 이들은 대체로 그 자신이 액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물고기들은 스스로가 액체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 세계에서는 유체가 공간이다. 유체는 사물들의 움직임을 제약한다. 유체 자체가 3차원이므로 사물들은 3차원적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 유체 세계에서는 연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유체를 매개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고, 심지어는 분리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간이 실체적이고자 하면 공간은 반드시 그 고유의 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공간이 반드시 그 거주자들에게 식별 불가능할 필요는 없다. 공간은 물체의 움직임에 따라 저항을 일으키거나 흔적을 남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공간과 그 안에 있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관계적 실체론에 따르면 공간과 물질적 사물은 동등하게 개체의 기초적 유형이다. 사물과 공간의 장소 사이에는 공간적 위치라는 원초적인 관계가 성립된다. 수용자 실체론에 따르면 공간과 물질적 사물은 동등하게 개체의 기초적 유형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물질적 사물들은 실체적 공간 안에 포함되어 있고, 물질적 사물들 사이 혹은 밖에는 공간만이 존재한다. -실체론에 따르면, 공간만이 기초적인 물질적 사물이다. 다른 물질적 사물들은 이러한 공간이 다양한 속성들을 가짐으로써 구성된다. 따라서 사물들은 공간에 부수적이며, 공간만이 유일하게 기초적인 물리적 개체다.

  

   이제 실체론의 입장을 정리해보자. 물리적 세계는 물질적 사물들에 더해 별도의 개체인 공간으로 구성된다. 공간은 특정한 종류의 내재적 본성을 갖는다. 공간은 특정한 위상학적 또는 기하학적 속성들을 갖는다. 공간은 물질적 사물들에 대해서 관계적, 수용적 또는 초-실체적 관계를 갖는다. 물질적 사물들은 공간과의 관계에 따라 특정한 공간적 속성들을 갖는다. 물질적 사물들이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공간에 의해서 제약된다. 동일한 공간에 위치한 사물들이 동일한 물리적 세계의 일부이므로, 우리 공간의 연장은 우리 세계의 연장을 결정한다.

 

9.5. 관계론 :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

    공간이 어떤 본성을 갖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공간은 다른 물질적 사물들과 같은 종류의 물질로 구성되지도 않았고, 직접적으로 관찰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오컴의 기준을 따라서 공간이라는 사물을 추정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관계론은 다양한 입장을 취할 수 있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공통적으로 포함한다. 사물들은 공간적 관계들에 의해 서로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계된다. 관계론은 공간-사물 관계에 호소하지 않고 사물-사물 관계에 호소한다. 공간적 관계는 물질적 사물들이 소유할 수 있는 관계적인 속성이다. , 관계론자는 수정된 진공 개념을 제시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관계론에서 말하는 관계란 무엇인가? 우리는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관계는 무엇을 관계 짓는가? 관계론에서는 연장된 사물들을 그들 자체가 공간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점-입자들의 융합체로서 여긴다. 일반적으로 관계와 관계적 속성은 함께 간다. 다양한 종류의 관계들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사물들을 분리하는 거리 관계가 갖는 구체적인 특성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거리는 구체적 개체들 사이에 적용되는 구체적 관계다. 또한 거리는 대칭적, 전이적, 반사적 관계다. 공간적 관계는 내재적 관계가 아니라 외재적 관계다. XY가 거리적 관계를 맺고 있을 때, Y의 변화에 X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거리적 관계는 비수반적 관계이다. 수반적 관계는 개체의 다른 속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관계이지만, 거리적 관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관계론 역시 어느 정도의 존재론적 비용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비록 관계론에서는 실체적 공간이 등장하지 않지만 공간적 관계라는 추가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간적 관계는 실재할 뿐 아니라 두드러지는 기능을 수행한다. 사물들 사이의 진정한 유대 혹은 연결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공간적 관계는 영향력이 있다(potent). 왜냐하면 이 관계는 대상들의 법칙적으로 가능한 움직임을 제약하고 제한하기 때문이다.

  

   실체론자는 텅 빈 공간이 존재한다고 본다. 관계론자는 사물이 없는 장소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일상적인 직관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관계론자는 다음과 같이 대응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특정한 공간적 관계를 맺지 않는 이상, 그 거리가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지도는 단지 우리가 만들어낸 실재에 대한 표상일 뿐이다. 사물들이 갖는 모든 거리 관계는 관계론적 용어들로 설명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계론자의 대응에는 일관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실재론적 관계론자와 관념론적 관계론자의 구분이 필요하다. 실재론적 관계론자는 공간에 대한 참된 진술이, 물질적 사물들과 그들이 갖는 관계에 대한 사실에 의해 참이 된다고 본다. 관념론적 관계론자에 따르면 공간에 대한 참된 진술은 인간의 마음과 감각 경험의 패턴에 관한 사실에 의해 참이 된다. 관념론자는 실재론자와 달리,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공간적 사실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논하는 입장은 기본적으로 실재론적 관계론자의 입장이다.

 

9.6. 거리에 대한 두 개념

    관계론자는 공간적 관계가 공간을 통해서(through)가 아니라 공간을 가로질러(across) 성립한다고 본다. 관계론자는 태양과 행성을 이어주는 철사 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사물들 사이에서의 공간의 매개를 부정한다. 관계론자의 관계는 원격적인 힘과 유사하다. 관계론자는 관계를 실재를 이루는 기초적 구성 성분들 중 하나로 본다.

  

   유클리드적 평면에 점들이 가득 차 있고, 두 점 PQ 사이의 거리가 20미터라고 하자. 이 때 중간에 지름 10미터인 원형 부분을 도려냈다고 하자. 다음에는 중간의 지름 10미터인 부분 전체를 통째로 드러내버렸다고 하자. 이 두 경우에 PQ 사이의 거리는 어떻게 될까?

  

   가우스적 거리 개념에 따르면, 거리란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경로다. 이 때 경로는 공간의 점들을 통과하는 연속적인 것이다. 이러한 가우스적 거리 개념을 쓰면, 첫 번째 경우에서의 거리는 20미터보다 커지고, 두 번째 경우에서 거리는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우스적 거리 개념은 현대 시공간 이론에서 사용되는 미분기하학의 기초라고 볼 수 있다.

  

   내재적 거리 개념에 따르면, 거리는 오직 두 점의 특성들에만 의존한다. 이 거리 개념을 쓰면 첫 번째, 두 번째 경우 모두 두 점 사이에서의 거리인 20미터는 변하지 않는다. 내재적 거리 개념 역시 오늘날 여전히 존재한다. 계량 공간의 추상적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계량 공간은 거리 공리를 따르는 거리 관계 집합과 점들로 구성된다. 내재적 거리 개념이 물리적으로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내재적 거리 개념이 어느 정도의 직관적 호소력을 가진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실체론적 입장은 멀리 있는 점들이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내재적 거리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내재적 거리 개념은 관계론에도 적용될 수 있다. 관계론에서 내재적 거리 개념을 도입하면, 사물들 각각이 형성하는 독립된 우주들이 내재적 거리 관계를 통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9.7. 운동에 대한 두 개념

   관계론과 실체론은 둘 다 형이상학적으로 일관성이 있다. 따라서 실제 우리의 우주가 실체론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적 논의를 벗어나 경험 혹은 과학적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운동에 대한 두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실체론자는 물체가 서로 다른 시간에 실체적 공간의 서로 다른 위치를 점유할 때 운동한다고 본다. 관계론자는 물체가 다른 물체들과 같은 거리 관계가 변할 때 운동한다고 본다. 실체론자는 절대적 운동이 있다고 보고, 관계론자는 절대적 운동이 없다고 본다. 더 정확하게 말해, 실체론자는 관계론자와 달리 실체적 공간에 대한 상대적인 운동이 가능하다고 본다.

  

   공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물체의 운동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우주선이 상대적으로 시속 10킬로미터의 속도로 멀어지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실체론자는 실체적 공간에 대한 우주선의 실재적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관계론자는 우주선 사이의 상대 운동, 다른 물질적 사물들에 대한 우주선의 상대 운동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9.8. 실체론-관계론 주장 정리(Matters terminological)

    관계론자의 주장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자. 실체론자는 관계론자와는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 공간과 시간은 자신들의 존재를 사물과 사건의 존재에 의존한다.

    ◎ 공간과 시간은 실체들이 아니다.

    ◎ 사물 또는 사건의 시공간적 위치는 이 사물이나 사건이 다른 사물 혹은 사건과 갖는 시공간적 관계의 용어로 분석되어야 한다.

    ◎ 모든 운동은 상대적 운동이다. 사물은 그것이 다른 사물들과 갖는 거리가 바뀜으로써만 운동한다.

    ◎ 기하학적 속성이나 간격의 합동 관계 같은 시공간의 특정한 측면들은 사물 혹은 사건의 행동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 모든 시공간적 사실들은 비시공간적 개념들로 분석되어야 한다.

    ◎ 지속, 거리와 같은 특정한 크기들이 기준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시공간은 상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