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배리 데인튼, [시간과 공간] 요약 정리 07: 시간과 의식

강형구 2016. 3. 22. 07:00

 

7: 시간과 의식

(Time and consciousness)

 

7.1. 시간에 대한 미시현상학

    이 장의 목적은 우리의 의식 흐름 내에서의 순간들에 대한 경험을 현상학적(phenomenological)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시간 그 자체에 대한 본성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밝혀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인 데이비스(Davies) 역시, 시간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그저 환영이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경험의 현상학적인 두 가지 측면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지속(persistence)과 변화(change)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속의 경우, 감각이 변하지 않더라도 이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계속 지속되고 있다. 이를 의식이 계속 흐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경험의 시간적 측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다음과 같은 두 사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변화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다.

   ▲ 우리의 경험은 현상학적 흐름(지속)이라는 측면을 갖는다.

 

7.2. 기억에 기초한 설명

    기억이 단기간의 현상학적 시간이 갖는 특성에 전적으로 관여한다(책임이 있다)는 입장이 있다. 예를 들어, 연이어 C-D-E라는 세 개의 음을 듣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기억이론가는 기억을 활용하여 D를 들을 때 C를 직전에 들은 것으로 믿고, E를 들을 때 CD를 들었으며 둘 중 특히 D를 직전에 들은 것으로 믿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우리는 시간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의식에 기억이론가가 말하는 믿음들을 갖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은 믿음들로 포화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기억이론가는 믿음을 사용하지 않고, D를 들을 때는 C에 대한 단기기억상(short-term memory-image)이 동반되고, E를 들을 때는 D가 뒤따랐던 C에 대한 단기기억상이 동반된다고 답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입장에도 문제가 있다. 첫째, 이 입장은 연속적 경험에 대한 단기기억을 전제하나, 이는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미리 전제하는 셈이 된다. 둘째, 시간적 의식은 전적으로 경험적 기억의 산물이라는 강한 주장은 유지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주장이 옳을 경우 지속 또는 변화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없으며, 지속 없는 경험에 대한 광대한 수의 기억들이 얽혀서(nested) 지속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다.

 

7.3. 펄스(pulse) 이론

    대안적인 입장으로, 우리 의식의 흐름은 경험의 짧은 펄스(박동)들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펄스들은 유한한 지속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연속하는 음 C-D-E-F를 들을 때, 경험은 두 개의 펄스 P1P2로 구성되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펄스 이론이 맞을 경우, 우리는 펄스 내에서의 변화와 펄스들 사이에서의 변화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구분을 경험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또한 이 입장에 따르면, P2P1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고 P1P2 사이에 100년의 시간 간격이 있어도 P1P2는 연속적 경험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이다. 게다가 동일한 소리를 들어도 주체 AB의 의식에 따라서 의식의 흐름이 다른데, 펄스 이론에서는 A의 흐름과 B의 흐름이 뒤섞여도 이를 구분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펄스 이론의 위와 같은 단점은, 의식의 흐름이 직접적인 선행자와 후행자에 현상학적으로 묶여 있으며, 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7.4. 자각(awareness)과 중첩(overlap)

    이제, ‘경험을 연달아 갖는 것연속에 대한 경험을 구분해보자. 우리는 잇따르는 경험을 갖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에 대한 경험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의식은 현상적 내용과 자각의 행위로 구분될 수 있다. 자각의 행위는 둘 이상의 순간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야 연속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각의 행위 A1, A2, A3을 생각해보자. 각각의 행위에 현상적 내용이 다음과 같이 포함된다. A1(C,D), A2(D,E), A3(E,F). 여기서 A1, A2, A3에는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이를 브로드(Broad)에 의해서 제시된 자각-중첩 모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모형에도 문제가 있다. 첫째, 이 모형을 받아들이면 우리 의식의 흐름이 비실재적으로 분절되는 것으로 보인다(A1, A2, A3으로). 둘째, 이 모형에 따르면 중첩이 일어나면서 하나의 내용이 두 번 경험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는 현상적 내용을 오직 한 번만 경험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를 반복되는 내용문제라고 한다.

 

7.5. 2차원적 모형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잇따르는 자각의 행위 속에서 수적으로 동일한 내용이 파악된다고 보지 않고, 그 이전의 내용을 표상하는 다른 순간적 내용에 대한 자각으로 순간적 행위가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현재성(presentedness)’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재성의 정도(degree)가 점점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브로드와 후설(Husserl)이 제시한 이 모형에서는, 자각의 행위 순서와 현재성의 정도를 두 축으로 하여 의식의 시간성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2차원적 모형이라 한다(110쪽 참조).

  

   이 모형은 추가적인 차원을 도입하지만, 이는 의식 내에서 도입하는 것이지 세계 자체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이 모형은 무한퇴행의 문제에도 빠지지 않는다. 겉보기(specious) 현재는 복잡한 내용들을 가진 순간적인 자각으로 이루어지고, 이러한 자각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자각들이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형은 B-이론가의 정적 또는 흐름 없는 시간 개념과도 양립가능하다. 또한 이 모형은 현상학적 흐름이라는 경험적 특질 역시도 설명해준다. 동일한 현상학적 내용도 정도를 달리하면서 계속 반복되는 것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들에 직면한다.

  

   ○ 현상학적 비정확성

    2차원적 모형에 따르면, 첫째, 경험은 급작스럽게 중단될 수 없다. 둘째, 우리의 의식은 최근의 경험에 대한 잔여물들로 채워진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경험은 급작스럽게 중단될 수 있으며, 의식이 이전 경험의 희미한 잔여물로 차 있지도 않다.

  

   ○ 문제가 되는 현재성

    이 모형에 등장하는 현재성의 정체를 규명할 필요가 생긴다. 2차원적 모형에서는 현재성이 내재적 속성이며, 변화할 수 있는 강도를 가지고 해당 경험이 실제적인지 과거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와 같은 속성이 실제로 존재하는지가 불분명하다. 또한 만약 그러한 속성의 담지자가 경험의 요소라고 해도, 그 속성의 존재 여부에 따라 경험이 달라진다고 보기도 어렵다.

  

   ○ 분절된 의식

    이 모형에서 각각의 자각들은 곁에 있는 자각들과 분리되어 있어서, 현상학적 유대(bond)라는 경험의 특징을 온전하게 수용하지 못한다.

 

7.6. 중첩 이론

    이른바 반복되는 내용문제에 대한 좀 더 단순한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내용 C-D를 갖는 자각 A1이 있고, 내용 D-E를 갖는 자각 A2가 있다고 할 때, 두 자각 A1A2가 부분적으로 중첩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상정하면 반복되는 내용문제가 해결되고, 오직 하나의 경험만 있게 된다. 이는 자각의 행위가 시간적으로 연장(extension)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 변화 또는 연속(succession)의 자각은 그 자체로 시간적으로 연장되어 있다.

  

   내용과 자각이 함께 간다고 보면, 굳이 둘을 구분할 필요 없이 단순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 별도의 자각 없이 현상학적 내용들이 그 자체로 의식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의식의 내용들은 동시의식적(co-conscious)’이다. 의식의 내용들은 함께 경험되며, 이때 경험은 짧은 지속 동안의 내용들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 소리 C-D-E를 경험한다고 해보자. C-D는 동시의식적이고, D-E는 동시의식적이다. 그러나 C-E가 동시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 통시적(diachronic) 동시의식성은 비전이적(non-transitive)이다.

  

   동시의식성은 비전이적이지만 대칭적이다. , 동시의식성만으로는 의식이 특정한 방향을 갖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동시의식적 내용은 내재적인 방향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내재적(immanent) 흐름은 다양한 감각들(청각, 시각, 후각, 미각 등)에 적용된다.

  

   현상학적 내용이 내재적 흐름을 가지면 중첩 이론을 통해 현상학적 시간성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할 수 있다. 첫째, 동시의식이 시간상 연장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직접적으로 변화를 자각할 수 있다. 둘째, 겉보기의(specious) 현재는 짧은 지속이다. 셋째, 현상학적 내용이 내재적으로 역동적이고 방향성을 가지므로 의식은 특정한 방향으로 흐른다. 내재적 흐름이라는 경험의 특성은 모든 종류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 특질이며, 설명을 위해 임시방편적으로 도입한 것은 아니다.

  

   이 모형에서는 한 흐름에 속한다(co-streamal)’는 특성도 설명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동시의식적이거나, 간접적으로 동시의식적일 경우(중첩되는 직접적 동시의식들의 사슬의 일부를 구성할 경우) 한 흐름에 속한다. 더 나아가, 현상학적 우선성(priority)으로 연결되어 있는 의식의 전체 상태들에 포함되는 경험은 동일한 현상학적 시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7.7. 현상학적 화살

    현상학적 시간의 방향은 상당한 자율성(autonomy)을 갖는다. 우주가 수축하는 골드 우주에서도 이 시간은 평상시의 방향을 갖는다. 우리가 만약 미래를 기억하는 기억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은 동일하게 유지될 것이다. 더 나아가, 과거와 미래에 대한 기억을 동시에 갖게 된다고 해도 현상학적 시간의 흐름은 마찬가지다. 물론 다른 방식의 우주에서 다른 경험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대한 다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다.

  

   데인턴은 우리가 시간에 대해 명료하게 사고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우리 의식의 보편적인 특성이 바로 내재적인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지에 있어 시각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시간을 기하학적으로 사고하고, 그렇기에 시간을 그 자체로서 파악하기 힘들다는 이유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7.8. 추가적인 귀결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2가지 판본의 현재주의는 우리의 의식흐름구조와 양립불가능하다. 첫째, 유아론적 현재주의에서는 오직 하나의 현재로만 실재의 총합이 구성되어 있다고 보나, 이는 지속을 갖는 경험의 특성에 어긋난다. 둘째, 다세계 현재주의에서는 실재가 광대한 양의 현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나, 이 또한 경험의 지속성과 맞지 않는다.

  

   역동적 현재주의는 이미 지나간 의식의 흐름이 갖는 특성과 내용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역동적 현재주의는 하나의 통합된 경험 속에 CD가 있을 때, CD가 동시의식적이지만 D는 실재하는 반면 C는 비실재적인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역동적 현재주의에 따르면 C, D는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의 경험적 특성상 CD는 동시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역동적 현재주의자는 ‘CD가 통시적으로 동시의식적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면 되지 않느냐고 대응할 것이며, 이와 같은 추상적 명제에 루크레티우스적 속성을 부여하는 것을 고려할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 개체인 명제가 갖는 루크레티우스적 속성은 그 자체로 경험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나머지 이론들에 대해서 시간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 블록 모형이나 역동적(성장하는) 블록 모형은 현상학적 설명과 양립가능하다. 역동적 현재주의의 혼합주의적 형태는 중첩 이론과 유사하다. , 역동적 현재주의의 순간들이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 반면 현상학적 경험들이 방향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형이상학적이 아닌 경험적 고려를 통해 시간에 대한 2가지 모형을 배제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경험에 대해 논의했다면, 다음 장에서는 과학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과학에 대한 논의가 시간에 대한 모형을 평가하는 데 어떤 함축을 갖는지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