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고독한 혁명가에서 창조적 재해석자로 : 아인슈타인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들

강형구 2015. 12. 13. 19:59

 

1. 여는 말: 죽은 아인슈타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토머스 쿤은 자신의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성숙과학의 지위에 오른 과학이 위기 상황을 맞이했을 때의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전까지의 패러다임과는 공약불가능할 정도로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과학자들이 갖는 영감의 원천들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등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입각한 이전까지의 천문학 및 물리학과는 공약불가능한 새로운 천문학과 물리학을 착안했지만,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고 과정을 통해서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었는지의 문제는 들춰볼 수 없는 어두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쿤은 이들이 오랜 중세의 종교적 지배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혁신의 분위기 속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로부터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만, 이들의 사고 과정을 그 이상으로 파고드는 작업은 하지 않으며 그러한 작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과학혁명기 과학자들에 대한 위와 같은 쿤의 서술 구도 속에서 아인슈타인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와 유사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19세기 말 무렵에 이르러 질점과 원격힘에 기반한 고전역학에 반하는 변칙사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당대의 물리학자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의 유효성에 대해 서서히 의문을 제기하면서 뉴턴의 패러다임은 위기의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 위기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적같이 창시해낸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등장한 이후 시간, 길이, 질량, 에너지 등과 같은 물리학의 중요한 개념들은 이전까지 고전역학에서 사용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과연 무엇이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이에 대해 쿤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쿤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착상이 아인슈타인이라는 개인의 머릿속에 불현듯 찾아들었고, 이러한 착상은 전적으로 아인슈타인 개인의 창조성 및 우연에 의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쿤 이전까지 과학자로서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상()은 주로 물리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그려졌다. 브릿지먼을 비롯한 물리학자들과 20세기 중반의 과학철학을 대변하던 논리경험주의자들에게 비친 아인슈타인은 엄격한 경험주의자였다. 아인슈타인의 과학과 철학에 대한 물리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은 19세기 말의 실증주의자였던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가 제시한 지침을 따라 경험적으로 지각 불가능한 절대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폐기하고 시간과 길이 등 물리학의 주요 개념들이 반드시 우리의 감각지각들과 명료하게 대응해야 함을 주장했고, 이러한 입장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을 정초하는 기초가 되었다. , 물리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은 경험주의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이 얻은 영감의 원천은 오직 직접적인 감각경험 뿐이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논리경험주의의 과학철학을 형성하는 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쿤 이후 경험주의적 합리성을 대변하던 아인슈타인의 상은 고독하고 영감에 찬 혁명가로서의 아인슈타인으로 바뀌었다. 패러다임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독창성과 창조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일반 대중들에게도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고, 혁명가로서의 아인슈타인, 범접할 수 없는 고독한 창조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미지 또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과연 쿤이 그리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이 아인슈타인 본인의 실제 모습과 정확이 들어맞았던 것일까? 쿤이 말하는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도저히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치 예술가들이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과정을 통해 영감과 착상을 얻는 그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물리학을 구상했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논리경험주의자들이 그렸던 엄격한 경험주의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이 상당 부분 왜곡된 것이었다면, 쿤의 아인슈타인 또한 아인슈타인 본인의 모습에 대한 다소 과장된 왜곡이 아니었을까?

 

   비교적 최근인 2004년에 발간된 Isis 95호의 포커스 주제는 다름아인 아인슈타인이었다. 물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이 서문을 쓴 이 포커스에는 서로 다른 세 명의 저자들이 쓴 아인슈타인에 대한 논문들 세 편이 실려 있다. 프레드 제롬(Fred Jerome)은 젊은 시절부터 정치적으로 급진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아인슈타인을 그리고 있고, 올리비어 대리걸(Olivier Darrigol)은 특수상대성이론에 근접했던 또다른 수학자물리학자였던 앙리 뿌엥까레(Henri Poincaré)와 아인슈타인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수록된 논문들 중에서도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위르겐 렌(Jürgen Renn)의 논문인데, 렌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은 고전물리학을 뒤엎은 혁명적인 물리학자가 아니라 평생동안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며 고전물리학을 완성시킨 갈릴레오의 제자(Galilo's disciple)’였다. 렌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이라는 물리 이론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비한 창조성때문이 아니라 이전까지의 물리학자들이 수립한 결과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렌이 그리는 아인슈타인은 고독한 혁명가가 아닌 독창적 재해석자다.

 

   왜 쿤이 그리는 아인슈타인과 렌이 그리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이 이토록 다른 것일까? 쿤에서부터 렌에 이르기까지의 과학사학자들은 죽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가며 거듭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해 온 것일까? 동일한 인물인 아인슈타인에 대한 해석이 점차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단순히 과학사가들 사이에서의 관점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러한 해석의 변화는 과학사 자체의 관심사와 초점 및 탐구 방법 또한 달라져왔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글에서 나는 아인슈타인에 대한 과학사학자들의 해석의 변화가 과학자와 과학자의 이론적 업적을 해석하는 과학사의 관점 및 방법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사의 관점에서 아인슈타인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들인 제럴드 홀턴(Gerald Holton),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 위르겐 렌(Jürgen Renn)의 주요 저작들을 분석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과학자와 과학자의 이론적 업적을 분석하는 과학사의 방법이 쿤 이후 점차적으로 더 다면적이고 심층적인 것으로 진화해 왔음이 드러날 것이다.

 

2. 제럴드 홀턴(Gerald Holton): 과학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들(themes)

 

   물리학자이자 과학사이기도 한 홀턴은 쿤이 그리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에도, 논리경험주의자가 그리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논리경험주의의 과학철학에 의하면 과학 이론은 분석적(analytic) 명제들과 경험적(empirical, 혹은 홀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상적) 명제들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론의 분석적 명제들은 이론을 내적으로 구성하는 수학적 명제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반면, 경험적 명제들은 한 이론을 인간이 지각가능한 외부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논리경험주의자들은 과학 이론의 분석적 명제들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 그 이론의 논리적인 특성이 무엇인지를 밝힐 수 있고, 그 이론의 경험적 명제들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서 이 이론이 지각가능한 외부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렇듯 과학 이론을 분석적 영역과 경험적 영역 두 차원으로 구분지어서 분석하는 것은, 홀턴 자신이 인정하듯 근대 이후 이른바 과학적 지식이 발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 이론의 본성을 명료화하는 데에 큰 이점을 가져왔다. 어떤 새로운 과학 이론이 제시되었을 경우, 그 이론을 창안한 과학자가 어떤 동기와 지침들을 가지고 해당 이론을 구성할 수 있었는지를(발견의 맥락, context of discovery) 따지는 것은 그 이론의 과학적 타당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 이론의 분석적 명제들이 상호 모순 없이 일관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불합리하거나 임시방편적인 요소들이 이론의 분석적 부분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는지, 또한 이론이 이전까지 알려져 있던 경험 자료들과 정확히 일치하며 더 나아가 새롭고 참신한 경험적 예측을 제시하는지 등을 통해(정당화의 맥락, context of justification) 해당 이론의 타당성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실제로 근대 이후 과학자 사회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새롭게 제시되는 과학 이론들을 평가했고, 이론들을 평가하는 이와 같은 합리적 방법론으로 인해서 과학의 발전이 촉진될 수 있었다.

 

   논리경험주의의 과학철학 또한 이와 같은 2차원적 분석 방법을 통해서 과학 이론들의 본성을 탐구하고자 했고, 이들의 이러한 작업이 과학적 지식의 중요한 특징들 및 과학적 지식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2차원적인 분석은 해당 과학 이론을 만든 과학자가 어떤 문제 의식 속에서, 어떤 지침과 원리들을 따라가며그 이론을 형성시켰는지, 또한 그 과학자가 자신의 외부 여건들과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과학 이론을 구성해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논리경험주의의 과학철학을 비판했던 쿤의 문제 의식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 과학의 역사에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른바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법한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혁이 일어났고,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혁은 논리경험주의가 과학 이론을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이 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쿤은 적절한 문제를 제기했을 뿐 그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답을 제시해주지는 못했다. 쿤이 말하는 것처럼 과학혁명기의 과학자들이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 요소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면, 그러한 외부적 요소들의 영향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착상이 몇몇 창조적인 과학자들의 뇌리에 순간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쿤의 주장은 어느 정도나 합당한 것인가? 만약 쿤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과학혁명을 주도한 과학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된 과정을 합리적으로 탐구할 수 없게 될 것이지만, 이러한 입장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갈릴레오는 르네상스 시대의 임페투스 이론 및 아르키메데스의 정역학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며, 뉴턴 또한 데까르뜨의 물리학과 철학 및 갈릴레오, 케플러, 후크 등의 역학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로 맥스웰과 로렌츠의 전자기학, 플랑크와 볼츠만의 통계역학 및 마흐와 뿌엥까레의 과학적 인식론으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영감들을 얻었다. 따라서, 비록 과학혁명의 과학자들이 정말로 혁명적인 패러다임을 창시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작업은 당대 혹은 그 이전의 다른 과학자들의 이론적 작업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고 이러한 연관성은 과학사적 연구를 통해 충분히 밝혀질 수 있다.

 

   위와 같은 문제 의식을 가졌던 홀턴은, 논리경험주의 과학철학 및 쿤이 제안한 과학혁명의 역사가 보여준 난점들을 피하기 위해 과학사에 대한 다층적인 분석이 필요함을 제시한다. 홀턴에 의하면 과학사가가 한 과학자와 과학 이론을 분석할 경우, 당시 사회가 갖고 있던 과학적 지식의 수준 및 발달 과정, 해당 과학자의 개인적인 과학적 지식의 발달 과정, 해당 과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서 인내한 내적 고통들과 투쟁들, 그 과학자의 이론이 과학자 공동체에 발표된 후 이 이론이 사회에서 수용된 과정, 이후 이 이론이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에 어떤 종류의 영향들을 미쳤는지 등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다층적인 분석 작업이 한 명의 과학사가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각각의 과학사가들은 자신이 흥미를 갖는 특정 부분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으며, 이러한 부분적인 연구 성과들이 전체적으로 종합된 이후에야 비로소 해당 과학자와 과학 이론에 대한 적절한 과학사적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과학사가이자 물리학자이기도 했던 홀턴은 논리경험주의자들 및 쿤이 간과했던 다음과 같은 측면, 즉 과학의 역사상 혁신적인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이 과연 어떤 동기들과 지침들을 갖고 새로운 과학 이론을 제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홀턴은 갈릴레오, 케플러, 아인슈타인, 보어를 비롯한 양자역학의 창시자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이론을 수립하는 과정 자체를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분석한다. 그 결과 홀턴은 다음과 같은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가 익히 혁명적이라고 생각했던 과학자들은 사실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상당히 혁신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몇몇 전통들을 계승하고 완성하는 후계자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이들 과학자들은 에너지의 보존 원리, 결정론적 세계관, 단순성의 원리, 대응 원리, 일반성의 원리, 대칭성의 원리, 연속성의 원리 등과 같은 일정한 주제들 중 몇 가지를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유지했으며, 이러한 주제들은 이들의 과학적 탐구를 추동하는 주된 원동력의 기능을 수행했음을 홀턴은 발견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이런 일련의 주제들이 과학적 지식이 태동하던 그리스 시대로부터 발견된다는 것이다.

 

   홀턴은 아인슈타인으로부터도 이러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 본인은 자신을 혁명자가 아닌 계승자로 생각했으며,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은 패러데이와 맥스웰로부터 시작된 전자기장 프로그램의 연장선에 서 있다고 그 자신 스스로 술회했다. 당대의 전자기학과 역학이 전기장과 자기장 사이의 대칭성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인슈타인은 이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졌으며, 이러한 불만은 그를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이끈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평생 동안의 이론적 작업을 통해 일관되게 고집했던 상대성 원리는 일종의 대칭성 원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학생 시절부터 과학 이론의 단순성과 일관성을 해당 과학 이론을 평가하는 결정적인 요소들로 여겼으며, 이는 아인슈타인 본인이 쓴 자서전적 회고 및 그의 강연록들 속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아인슈타인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양자역학의 해석을 둘러싸고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 양자역학의 창시자들과 의견을 달리했고, 이러한 의견의 차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고대로부터 존재해 온 주제인 결정론적 세계관을 일관되게 고집했음을 보여준다.

 

   자연의 단순성(simplicity), 이론의 일관성(consistency) 및 대칭성 등과 같은 특정 주제들은 한 과학자가 어떤 과학 이론을 평가할때 뿐만 아니라 해당 과학 이론의 타당성을 믿고 연구해 나가는 과정에도 중요한 동기를 제공한다. 우주의 수학적인 조화에 대한 종교와도 같은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케플러(Kepler)는 티코 브라헤(Tycho Brahe)가 남긴 엄청난 양의 천문 관측 자료들을 불굴의 의지로 계산할 수 있었고, 에너지 보존의 원리에 대한 강렬한 믿음과 열정은 플랑크(Planck)가 올바른 흑체 복사 공식을 유도하는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아인슈타인 또한 1907년 이후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하기까지, 밀레바 마리치와의 이혼 및 세계 1차대전의 경험 등과 같은 고난들을 겪어가면서도 끝내 1915년에 최종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도출할 수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를 인도했던 것은 상대성원리를 일반화시킴으로써 더 단순화되고 일반화된 물리학 이론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신념과 의지였다.

 

   역사상 주요한 과학자들에 대한 위와 같은 분석을 통해 홀턴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과학사가가 특정 과학자의 과학 이론을 분석할 때는 해당 과학 이론의 분석적 측면’, ‘경험적 측면과 더불어 주제적 측면(thematic aspect)’이라는 새로운 측면을 추가해서 고려해야 한다. 과학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군의 주요한 주제들이 있으며, 해당 과학자가 이 주제들 중 어떤 주제들을 자신의 과학적 작업의 중요한 동기들로 삼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해당 과학자의 과학 이론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고대로부터 동일한 종류의 주제들이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어져왔다면, 왜 우리는 과학의 역사 속에서 일관되게 발전하는 과학의 모습 대신 여러 차례의 혁명적인 변화 과정을 거치는 과학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홀턴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일군의 주제들 중 특정한 주제들을 선택해서 과학적 탐구를 수행하고, 따라서 서로 다른 주제들을 탐구의 중심 원리들로 삼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늘 일종의 대립이 일어난다. 과학자는 여러 다양한 주제들 중 소수의 주제들만을 선택해서 과학적 탐구의 추동력으로 삼는 까닭에, 과학자 개개인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과학적 탐구가 가능해지고 이에 따라 과학의 혁신 또한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홀턴의 생각이다.

 

   홀턴은 물리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과학자들에 대한 내적이고 분석적인 역사적 탐구를 통해 이들이 공유해 온 주제들을 발견했고, 이러한 주제들이 해당 과학자들의 과학적 업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통해 홀턴은 겉보기에 이들의 과학적 업적이 혁명적이고 불연속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의 작업이 여전히 일정 정도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이들이 스스로를 일종의 오래된 전통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과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주제들을 발견했다고 해서 여전히 몇몇의 의문들이 남는다. 만약 과학자들이 일정한 주제들을 서로 다르게 공유하는 사건만 벌어진다면, 과학의 역사에서는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과학 이론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할 뿐 과학 이론의 진보와 발전은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비록 홀턴이 과학사에 대한 다양한 층위의 분석들이 필요함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대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조건들과 문화적인 조건들이 어떤 방식으로 과학자의 과학적 활동에 침투하고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규명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그는 과학자들이 특정한 주제들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과학자가 새로운 종류의 과학적 이론을 수립하게 되는지를 충분하게 밝히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홀턴의 단점들은 그의 뒤를 이은 과학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조금씩 채워져나간다.

 

3.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 새로운 물질 문화의 생성과 더불어 결합하는 주제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공과대학 졸업(ETH) 이후 유럽 전역의 대학들을 대상으로 물리학과 조교 자리를 찾아보았지만 그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졸업 동기들 중에서 조교 자리에 지원하고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오직 아인슈타인 한 명 뿐이었다. 그는 취리히 근교에서 가정 교사 및 고등학교의 임시 교사로 일하면서 겨우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학시절에 만난 이후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았던 친구 마르셀 그로스만(Marcel Grossman, 훗날 스위스 공과대학의 수학과 교수가 된다)의 주선으로 스위스 특허청의 3급 심사관 자리를 얻는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에 소속되어 연구하지 못하고 특허청에서 매주 6일 동안 48시간의 근무를 해야 했지만, 그는 특허청의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친구들(콘라드 하비히트, 모리스 솔로빈, 미셸 베소)과 더불어 토론하고 연구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을 행복했던 시절로 추억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특허청에서 근무하던 기간 동안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기적의 해라고 불리우는 1905년에 이르러서는 물리학계를 뒤흔든 중요한 논문을 한 편도 아닌 다섯 편이나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대체 특허청의 아인슈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연구에 전문적으로 몰두할 수 없었던 특허청 직원이었던 어떻게 그가 1905년 한 해 동안 광양자 가설을 제시하고, 특수상대성이론을 창안하고, 브라운 운동에 대한 계산을 통해 분자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낼 수 있었을까? 단지 이것들이 아인슈타인의 초인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혹은 그의 범접할 수 없는 천재성의 결과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이는 우리가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이룩한 이론적 업적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과학사학자들은 당시의 아인슈타인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관심사를 가진 상황에서 이론적 작업을 진행했는지를 탐구할 수 있고, 당시 그가 어떤 인물들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물리학 정보들을 입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분석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당시의 아인슈타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물질적 환경 속에서 어떤 종류의 감각적 경험들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조명해볼 수도 있다.

 

   과학사가인 피터 갤리슨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특허청에서 일하던 아인슈타인이 경험하던 물질적 문화(material culture)의 특성에 대해 주목한다. 19세기 말은 전기공학의 본격적인 발달로 인해 유럽 전역의 도시에 전기 시설이 활발하게 설치되던 시기였다. 아인슈타인의 아버지와 삼촌은 전기공학과 관련된 회사를 운영했고,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부터 전기에 관련된 기계들을 다루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아인슈타인 자신이 회고한 바와 같이, 대학시절 그는 맥스웰(Maxwell), 헤르츠(Hertz), 로렌츠(Lorentz) 등에 의해 발전한 전자기학에 큰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하인리히 베버(Heinrich Weber) 교수의 물리학 실험실에서 전자기 실험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유난히 반항심과 독립심이 강하던 아인슈타인이 특허청에서 빠른 시일 안에 업무에 익숙해지고 특허청 직원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데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전기와 관련된 각종 기계적 작업들과 원리들에 친숙했던 것이 중요한 몫을 했다.

 

   당시 특허청에는 서로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시계를 동기화(synchronize)하는 방법과 관련된 특허 출원들이 상당수 제출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에서는 국가 구성 주체들의 경제적 활동 뿐만 아니라 정치적 활동의 영역 또한 광범위해지고, 국가 전체 단위의 조직적 활동의 중요성 및 그 빈도가 높아지면서, 정확한 시각에 여러 단위의 집단들이 조직적으로 행위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었다. 접수된 특허 출원들을 원리적으로 꼼꼼하게 검토해서 그 가능성 여부를 판단하던 일을 하던 아인슈타인으로서는, 출원된 접수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과정 속에서 서로 다른 관찰자들이 각각 현재의 시각을 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이들은 상대의 시각을 어떤 방법과 절차를 써서 비교해야 하는 것인지, 과연 이들에게 있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란 무엇인지 등과 같은 문제들에 친숙해졌다.

 

   그런데 위와 같은 시간에 관련된 문제들은 특수상대성이론의 핵심적 요소인 동시성의 정의를 해결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갤리슨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동시성의 정의에 관한 논의에, 빛으로 시간을 동기화하는 유비들(analogies)과 사례들이 사용되는 것에 주목한다. 이러한 유비들과 사례들은 아인슈타인이 특허청 직원으로서 근무하면서 늘상 경험할 수 있었던 친숙한 것들이며, 이들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이라는 이론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언어적인 상징과 기호를 통해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시각적인 이미지들을 자유자재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사고한다고 회고한 바 있다.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늘상 접할 수 있었던 개념들과 이와 관련된 시각적 이미지들이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창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이해한다면, 스위스 특허국은 아인슈타인이 물리학계에서 직장을 잡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일해야만 했던 공간이 아니라 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형성하는데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적극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사실들을 기반으로 이성적 추론을 해나가라는 것, 이와 같은 경험주의적 원칙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감각기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개념만을 물리학에서 받아들이라는 19세기 말의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의 충고는 아주 오랜 전통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경험주의적 원칙이라는 아주 익숙하고 오래된 주제가, 시간의 동기화라는 물질적 문화가 집약되는 스위스 특허청이라는 특정한 공간 속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작업과 결합했다는 데 있다. 홀턴이 말한 대로 과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몇몇 전통적인 주제들을 자신들의 연구 지침들로 삼지만, 그러한 주제들 자체만으로는 진정으로 새로운 과학적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의 경우, 경험주의적 원칙은 그가 속해 있던 특허청의 물질적 문화와 더불어서 그 추동력을 얻었고 그 결과로 아인슈타인은 동시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듯 과학에서의 전통적인 주제들은 당대의 물질적 문화와 우발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함으로써 작동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이론들을 생성해낸다.

 

   위와 같은 갤리슨의 분석은 아인슈타인과 그의 업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아인슈타인에게 스위스 특허청은, 물리학계라는 제도권 밖에서 권위에 의존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유롭고 창조적인 착상을 할 수 있도록 했던 장소로서만 기능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특허청이 아인슈타인에게 그런 수동적인 역할만을 담당했다면,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근무했더라도 특수상대성이론을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섣불리 역사적 사실에 대해 만일 그랬다면이라는 가정적인 추측을 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해 갤리슨은 아인슈타인 만큼이나 당시에 시간 동기화에 관심이 많았던 뿌엥까레(Poincaré)의 예를 든다. 끝내 에테르에 기반한 전자기학의 이상을 버리지 못했던, 따라서 로렌츠 변환과 국소 시간의 개념을 고안하면서도 절대 시간의 개념을 버리지 못했던 로렌츠와는 달리 뿌엥까레는 아인슈타인과 대등할 정도로 동시성의 새로운 정의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한 뿌엥까레가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기술적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친숙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이는 당대의 물질 문화가 새로운 개념을 착안하고 제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을 보여준다.

 

   어떤 시대이든 과학자 공동체와 이 공동체의 과학적 업적들은 그 시대의 물질적 문화와 맞물려 돌아간다는 것,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사례에서 갤리슨이 포착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지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특정 시대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의 연원을 그 시대의 물질적 문화와 격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 갈릴레오의 역학은 그의 시대에 이르러 개발된 전쟁 기술(특히 포사격 및 적 관측을 위한 망원경 제작과 관련된 기술들) 및 공학적 기술(정교한 측정자 및 각종 기계적 도구들)과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으며, 데까르뜨(Descates)의 기계적 세계관 또한 당대의 기계 제작 기술들과 무관하게 생각할 수 없다. 켈빈(Kelvin), 클라지우스(Clausius), 까르노(Carnot), 헬름홀츠(Helmholtz) 등의 열역학은 18세기 말 이후 유럽에서 널리 볼 수 있었던 증기기관들과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으며, 20세기 중반에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를 비롯한 일군의 과학자들에 의해 수립된 새로운 분야인 싸이버네틱스(Cybernetics) 또한 세계 1, 2차 대전에서 개발되고 사용된 전쟁 기술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런 물질 문화적 조건들은 특정한 과학자의 업적을 과학사적으로 분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이렇듯 갤리슨은, 당대의 물질 문화적 요소들이 전통적으로 존재해왔던 특정한 과학적 주제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에 핵심적으로 기여함을 설득력있게 보임으로써, 과학의 전 역사를 걸쳐 일군의 주제들이 과학자들에 의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되어 왔다는 홀턴의 제안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상당한 정도로 보완하고 있다. 과학사에서는 서로 다른 과학적 주제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전유된 주제들이 새로운 과학 이론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물질적 문화와 일정 정도 공명(resonate)해야 한다. 따라서 과학의 혁신적 발전은 시대에 따른 물질적 문화의 변천과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는다. 만약 시대의 흐름에 맞춰 끊임없이 물질적 문화의 조건들이 변화한다면, 각각의 시대에 등장하는 새로운 과학 이론들은 이러한 물질적 문화의 변화와 맞물리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갤리슨의 작업과 더불어 이제 우리는 과학의 역사를 더욱 더 역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매 시대마다 다양한 과학적 주제들이 과학자들에 의해 선별적으로 전유되고, 이러한 전유는 해당 시대의 물질적 문화와 공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출현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가 있다. 비록 당대의 물질적 문화가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이 등장하는 데 있어 일종의 필요조건으로 작용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물질적 조건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해당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와 맥락을 제대로 짚어낼 수 없다. 예를 들어 특수상대성이론의 경우, 이 이론이 등장한 이유와 맥락을 정확히 짚어내기 위해서는 아인슈타인이 당대 물리학계의 권위자들인 로렌츠(Lorentz), 플랑크(Planck), 볼츠만(Boltzman) 등의 이론적 작업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또한 그가 마흐(Mach)와 뿌엥까레(Poincaré)의 철학적 저서들로부터 어떤 착상을 얻었는지 등과 같은 요소들을 세부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일반상대성이론의 경우는 더욱 더 복잡하다. 아인슈타인이 아니었더라도 특수상대성이론이 등장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왜냐하면 당시 로렌츠, 뿌엥까레 등 이 이론에 근접한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의 경우 일관된 관점을 갖고 집중적으로 이론 구성을 추구한 아인슈타인과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이론 자체가 등장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다수 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던 시절, 그는 친하게 지내던 여러 물리학자들 및 수학자들에게 종종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편지를 통해 일반상대성이론에 비하면 특수상대성이론은 어린애 장난이었다고, 대학 시절 고등수학을 철저히 공부하지 못했던 것이 이토록 후회될 줄은 몰랐다고, 매일을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보내고 있다고 플랑크, 그로스만 등 친한 친구들에게 하소연한다. 플랑크의 경우 아인슈타인의 작업이 불가능할 것이며, 만약 그가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 이론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권고했지만, 아인슈타인은 끝내 자신의 이론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정한 과학 이론을 구성하기 위한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개인적인 투쟁은, 당대의 물질적 문화의 조건들 및 그가 어떤 특정한 과학적 주제들을 연구의 원리들로 삼았는지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이론적 작업을 진행시켰으며 어떤 문제들에 부딪쳤고 그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세부적으로 파악해야지만 그 이론의 전모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4. 위르겐 렌(Jürgen Renn): 영역들 사이의 경계 문제들과 함께 등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1912년에서 1913년 동안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연방공과대학(ETH)의 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는데, 이 때 그는 같은 학교의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그로스만과 긴밀한 협동 작업을 하며 일반상대성이론을 발전시킨다. 물리학자인 존 스테이철(John Stachel)이 예루살렘에 있던 아인슈타인 문서보관소(archive)에 산적해 있던 서류들 틈바구니에서 아인슈타인이 취리히 시절 기록해 놓은 80쪽 분량의 노트를 발견한 이후, 물리학자 및 과학사가들은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전시키는 시절 동안의 사고의 발전 과정을 하나하나 세세히 확인해볼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일반상대성이론의 전모를 더 분명히 밝힐 수 있었다. 이런 작업을 15년 가까이나 진행시켜온 물리학사가가 바로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의 위르겐 렌(Jürgen Renn)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취리히 노트에 씌어진 단어 하나 하나와 방정식 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마치 자신이 아인슈타인이 된 것처럼 일반상대성이론을 발전시키는 아인슈타인의 생각의 흐름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며 연구를 진행시켰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진전시킨 것이 아니라, 당시에 그가 활용할 수 있었던 다양한 경로들을 통해서 최신의 물리학수학의 성과들을 충분히 받아들인 상황에서 작업을 했다. 그는 친구인 수학자 그로스만으로부터 가우스(Gauss)와 리만(Riemann), 레비-치비타(Levi-Cevita) 등이 발전시킨 미분기하학(differential geometry)과 절대기하학(absolute geometry)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괴팅겐에서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David Hilbert) 앞에서 일련의 강의를 함으로써 힐베르트에게 일반상대성이론의 의의와 발전 방향을 납득시켰고, 이후 힐베르트와 활발한 서신교환을 하면서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단서들을 얻는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그 자신히 훗날 회고한 것처럼 오직 수학적 원리들을 통해서만 일반상대성이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학적 접근인 위에서 아래로의 접근과 물리학적 접근인 아래에서 위로의 접근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면서 이론을 진전시켜 나갔다.

 

   렌이 주목하는 아인슈타인의 특징은 바로 반성(reflection)’하고 재해석(reinterpretation)’하는 능력이다. 아인슈타인은 페르마(Fermat)나 뉴턴(Newton), 라이프니츠(Leibnitz)처럼 새로운 물리학을 위해 새로운 수학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물리학 이론을 발전시킬 새로운 주제(혹은 원리)를 고안할 필요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등속 운동하는 좌표계들은 자연 법칙을 기술하는 데 있어 서로 동등하다는 특수상대성원리는 갈릴레오의 시대 이후로 고전물리학에서 받아들여져 왔으며, 아인슈타인 당시에는 고전물리학 및 전자기학, 통계역학 등이 로렌츠, 플랑크, 볼츠만 등과 같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어느 정도 잘 확립되어 있었다. 일반상대성이론을 위한 수학 또한 가우스, 리만, 레비-치비타 등의 수학자들에 의해서 개발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렇듯 이미 개발되어 있고 발전되어 있는 각 분과 영역들의 성과들을 일관되게 통합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통합을 위해서는 이미 알려진 성과들에 대해 반성적으로 숙고하고 이를 통해 이 성과들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아인슈타인이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생각이라고 불렀던 등가원리또한 갈릴레오의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던 원리였다. 균일한 중력장 아래에서 질량이 서로 다른 두 물체를 떨어뜨렸을 경우 두 물체의 가속도가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동일하다는 것은, 임의의 질량을 가진 물체의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이 동일함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종류의 질량인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의 값이 왜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뉴턴 또한 의문을 제기했지만 이 의문을 뉴턴은 해결하지 못했다. 아주 오래 되었지만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해야 할 필요성 또한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 바로 그 문제에 일반상대성이론을 전개시키는 데 필수적인 단서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등가원리를 중심축으로 삼고, 서로 상대적인 등속도 운동을 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서로 상대적인 가속도 운동을 경우에도 상대성원리를 만족시키는 일반상대성이론으로의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는다. 그는 상대성원리등가원리를 만족시키면서도 극한의 경우 고전역학의 결과들을 근사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려고 애썼지만, 이 때에도 그는 새로운 수학을 만들 필요가 없이 이미 개발되어 있는 미분기하학과 절대기하학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기본적인 원리들과 수학적 도구들을 사용해서 일반적인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성의 과정은 지극히 난해했다. 일반상대성을 적용하는 문제는 단순히 수학적 지식을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고 해서 풀릴 문제가 아니었으며, 이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시기에 동일한 문제를 공략했던 뛰어난 수학자 힐베르트가 끝내 독자적으로 최종적인 중력장방정식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통해 드러난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의 수학적 측면과 물리학적 측면을 번갈아가면서 생각해야 했고, 문제의 각 단계들에서 맞이한 장애물들을 극복할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때로는 수학적 원리들에 의존하고 때로는 물리학적 원리들에 의존했다. 이러한 반성과 해석의 과정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남겨진 그의 취리히 노트에 잘 기록되어 있다. 노트에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1913년 경에 올바른 중력장방정식에 도달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 그는 이 방정식이 물리적 현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기각했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아인슈타인은 이전의 방정식으로 되돌아왔으며, 이 방정식이 일반공변성의 조건을 제대로 만족시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반성과 재해석 능력은 그가 특수상대성이론을 수립한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경우에도 기본적인 이론들은 모두 갖추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고전역학은 충분히 성숙해져 있었고, 맥스웰-로렌츠의 전자기학 또한 다양한 전자기적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달해 있었다. 하지만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을 조화시키는 경계의 영역에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다. 고전역학의 물리적 법칙들은 모두 갈릴레오 변환 아래에서 상대성원리를 만족시켰던 반면, 전자기학의 맥스웰방정식은 갈릴레오 변환에 대한 상대성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로렌츠의 경우 길이 수축(length contraction) 및 시간 지연(time delay) 가설을 도입하고, 정지 에테르에 상대적으로 운동하는 좌표계에 적용되는 국소 시간(local time)의 개념을 도입하는 등 특수상대성이론과 매우 유사한 결론에 이르렀지만, 그는 끝내 에테르 중심의 전자기학이라는 관점을 버리지 못하고 국소 시간을 단지 우연적(accident)이고 부수적인(auxiliary) 산물로만 여겼다.

 

   로렌츠가 우연적이고 부수적인 산물, 가상적인 산물로만 여겼던 국소 시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반성 및 재해석을 거치며 그 위치가 급격하게 변한다. 아인슈타인은 로렌츠의 국소 시간 개념이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동시성의 정의와 제대로 합치하는 시간 개념이라고 생각했고, 이 시간을 가상적 시간이 아닌 실제적 시간으로 변화시킨다. 이와 더불어 그는 로렌츠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에테르의 개념을 과감하게 버린다. 로렌츠가 그 존재 여부와 관련해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던 에테르의 개념을 계속 유지했던 것은 역학적 세계관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지만, 장의 물리학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맥스웰 이론에서의 전자기장이 역학적 매체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임을 받아들임으로써 에테르의 개념을 포기할 수 있었다.

 

   기존의 권위 있는 물리학자가 주변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한 사항들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이런 재해석과정을 통해 주변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이론의 중심부로 끌어들이는 작업(렌은 이러한 과정을 코페르니쿠스적 과정(Copernican Process)’이라고 부른다)은 광양자 가설을 담은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막스 플랑크는 흑체복사에 관해 알려진 실험적 법칙과 합치하는 복사 공식을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며 연구를 하던 도중, 빛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있음을 함축하는 자신의 복사 공식을 도출해낸다. 에너지의 연속성을 굳게 믿고 있던 플랑크는 이러한 자신의 이론적 성과가 갖는 물리학적 함축을 부정하려 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고전물리학적 전제들에서 복사 공식을 새롭게 도출하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이론적 작업이 갖는 의의를 거듭 반성해보고, 빛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었다는 데에서 더 나아가 빛 자체가 양자화되어있다는 급진적인 재해석을 제시함으로써 광전효과를 훌륭하게 설명해낼 수 있었다. 이 때에도 플랑크에게서 주변적이었던 빛 에너지의 양자화는 아인슈타인의 재해석을 거치면서 빛의 양자화로 변화되어 이론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된다.

 

   렌은 아인슈타인이 고독한 혁명자가 아닌 창조적 재해석자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또한 넓은 시야에서 보았을 때 아인슈타인은 고전물리학을 전복시킨 것이 아니라 완성시켰으며, 그런 까닭에 그는 다름아닌 갈릴레오의 제자(Galileo's disciple)’였다. 아인슈타인은 갈릴레오 시대부터 알려져 있던 상대성원리를 이론의 중심 원리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갈릴레오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그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던 등가원리를 새로운 중심 원리로 삼음으로써 일반상대성이론으로의 길을 열 수 있었다. 물론 갈릴레오의 시대와 아인슈타인의 시대 사이에 물리학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패러데이와 맥스웰을 거쳐 발전된 (field)의 물리학은 뉴턴이 창안한 질점과 힘의 물리학과는 상당히 다른 종류의 물리학이었으며, 끝내는 이러한 장의 물리학이 이전까지의 질점과 힘의 물리학을 포섭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종류의 물리학은 서로 많은 공통된 주제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질량 혹은 에너지에 관한) 보존 원리, 인과성의 원리, 연속성(continuity)의 원리, 대칭성(symmetry)의 원리, 단순성(simplicity)의 원리, 결정성(determination)의 원리 등과 같은 과학의 전통적인 주제들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후반부에 등장한 장의 물리학 또한 충분히 고전물리학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고 고전역학과의 결합 또한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갈릴레오의 시대 이후 고전물리학은 고전역학, 전자기학, 통계역학(statistical mechanics) 등과 같이 다수의 분과 영역들을 통해서 개별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며, 19세기 말에 이르면 이러한 각각의 영역들의 경계들(boundaries)에서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전자기장 방정식과 역학적 변환을 조화시키는 문제, 전자기적 에너지를 통계역학과 조화시키는 문제 등은 당시 각 영역들의 경계에서 발생한 주요한 문제들이었다. 이러한 영역 간 문제들을 해결해야지만 분과 영역들 사이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플랑크나 로렌츠와 같은 물리학자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역에서의 전통적인 원리들(플랑크의 경우 에너지의 연속성 원리, 로렌츠의 경우 에테르를 통해 여전히 역학적 세계관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깊이 사로잡혀 있던 까닭에, 영역들을 통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으면서도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지는 못했다.

 

   이 때 창조적 재해석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의 능력이 발휘된다. 비교적 제 3자의 입장에서 각 분과 영역들에서의 성과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당시까지 이루어졌던 물리학적 성과들에 대해서 거듭해서 반성적으로 고찰해보고, 이러한 반성적 고찰을 통해 이 성과들을 혁신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상대성원리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확고한 믿음 및 로렌츠의 이론적 성과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재해석을 통해서 등장할 수 있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상대성원리를 더 일반적인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아인슈타인의 자연스러운 시도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때에도 오래 전부터 알려진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의 동등함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반성과 재해석은 등가원리라는 일반상대성이론의 중심적 지침을 제공했다. 서로 다른 지식들 사이의 접경에서 생성되는 문제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심사숙고함으로써 기존의 이론적 성과들을 재해석할 수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낸 혁명가라기보다는 지식의 경계들을 넘나들며 서로 다른 종류의 지식들을 융합한 창조적 혁신가였다.

 

5. 맺는 말: 아인슈타인, 고독한 혁명가에서 창조적 재해석자로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쓴 자서전적인 글을 비롯한 여러 글들에서 자기 고유의 고독함을 여러번 말하곤 했다. 그는 아무리 친한 친구나 가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심리적인 거리감을 느꼈다. 그런 심리적 거리감, 지구에서 홀로 외톨이가 된 듯한 느낌은 그가 신을 경배하는 것과도 같은 경외스러운 마음으로 자연의 법칙들을 탐구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기능했다. 늘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복잡다단한 세상의 흐름을 관조하고자 했던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무심함은 그가 평생동안 아이와도 같은 순진함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또한 이는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탄 이후 다소 소박하기까지 한 방식으로 세계 평화 운동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던 주요한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의 문제에 대해서 골똘하게 생각할 때면, 그의 주변에서 그의 사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동료들은 아인슈타인이 자연이라는 신과 교감한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독특한 측면들은 분명 그의 내부로부터 비롯한 진실함의 결과들이었지만, 이는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격 및 업적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쳐가면서 물리학을 단순하고 통일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 그는 상대성이론이라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중대한 업적을 물리학에 남겼다. 그는 과학사학자도 아니고 과학철학자도 아니었던 까닭에, 또한 삶의 순간 순간 자신이 대면한 물리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도 벅찼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과학적 업적을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분명하게 해명하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업적이 등장한 이후, 그의 주변에 있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이해하려고 열망했다. 물리학자를 비롯한 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과학사학자들, 철학자들, 문학가들, 미술가들, 음악가들 및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인슈타인의 과학과 아인슈타인이라는 인물에 대해 열광했다. 하지만 이런 열광적이면서도 편파적인 관심 속에서 아인슈타인 본인이 느꼈던 고독감은 더욱 깊어갔고, 그를 둘러싼 신화들은 부풀어져만 갔다.

 

   논리경험주의자들이 그리는 완고한 경험주의자로서의 아인슈타인과 쿤이 그리는 고독한 혁명가로서의 아인슈타인은 아인슈타인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오해되고 왜곡되었던 아인슈타인의 본래 모습은 아인슈타인을 연구한 학자들의 노력을 통해 조금씩 명료해지고 분명해졌다. 홀턴은 다양한 층위의 분석 방법들을 동원해서 한 과학자의 이론적 업적을 평가해야 한다는 적절한 제안을 했고, 이는 이후 과학사들의 연구 방향에 중요한 지침을 제공했다. 우리는 과학자의 업적을 평가하기 위해 당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과학적 지식의 수준, 해당 과학자의 개인적인 지적 성장의 과정, 그 과학자가 주변의 다른 과학자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이론을 발전시켜왔는지 등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홀턴은 물리학사의 전 영역을 통해 거듭해서 등장하는 특정한 지침 및 원리들을 주제들(themes)’이라고 이름붙였고, 과학을 경험적 차원’, ‘분석적 차원’, ‘주제적 차원이라는 삼차원적인 관점(three dimensional perspective)에서 분석해야 한다는 중요한 주장을 했다.

 

   갤리슨은 기본적으로는 홀턴의 제안을 따르면서도 미처 홀턴이 포착하지 못했던 과학사의 중요한 측면을 탐지했다. 새로운 과학 이론이 등장은 그 시대 고유의 물질 문화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고 상당한 정도로 공명한다는 것, 그런 까닭에 과학사에서 등장한 중요한 과학적 업적을 평가할 경우 반드시 그 시대의 물질 문화와 해당 과학적 업적이 어떻게 서로 얽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갤리슨의 발견이자 주장이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먼 거리에 존재하는 시계들 사이의 동기화 문제가 급속도로 중요해진 19세기 말 서양 문화의 물질적 배경 조건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갤리슨과 더불어 렌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작업 방식의 어떠한 측면들이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혁신적인 물리학을 발전시킬 수 있게 만들었는지를 자세하게 분석함으로써, 아인슈타인 뿐만 아니라 과학사 전체를 통해 특정 과학자의 업적을 어떤 방법으로 탐구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중요한 시사를 해준다. 과학자는 고정된 과학적 지식의 영역에서 과학적 탐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지식의 여러 영역들 중 특정한 영역에 소속되어 과학적 탐구를 수행한다. 지식의 영역들이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할수록 각 영역들의 외연(extension)이 확장되고, 이에 따라 각 영역의 경계들이 서로 접하게 된다. 이런 영역들의 경계 지대에는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각각의 영역이 통합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 원리들 및 각 영역에서 이루어진 최신의 이론적 성과들을 반성하고 독창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지식의 경계 지대에서 발생한 주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고, 갈릴레오로부터 시작된 고전물리학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쿤 이후의 과학사를 통해 밝혀진 것처럼, 과학을 역사 속에서 분석할 수 있는 매우 다양한 층위들과 방법들이 있다. 과학적 활동은 해당 사회의 물질 문화적 조건을 배경으로 할 뿐만 아니라, 과학 또한 일종의 사회적 실천인 까닭에 당대의 정치적 권력의 역학 관계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작동한다. 과학적 업적을 생산하는 과학자 개개인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이론적인 탐구 과정도 중요하며, 과학자 개인들이 모인 과학자 공동체가 공동체 내적이고 외적인 측면에서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도 특정 과학이 형성되고 작동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과학사가들이 이 모든 요소들에 동등한 비중을 두고 연구할 수는 없다. 어떤 과학사가는 당대의 정치경제적 배경 속에서 과학적 지식의 합리성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주목하는 반면, 다른 과학사가는 한 과학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가며 이론적 탐구를 수행했는지를 주목한다. 이러한 각각의 방법은 각자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갖고 있는 까닭에, 하나의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더 나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판단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별 사례들을 분석하는 데 어떤 요소들이 더 중요하고 어떤 요소들이 덜 중요한지를 상대적인 방식으로나마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개별 사례들이 직접적으로 어떤 사건과 관련되었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그의 과학적 경력 속에서 그의 물리학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음은 분명해보인다. 물론 아인슈타인이 세계 대전 당시 유럽 과학자 공동체의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c)와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가 미국으로 건너온 후 어떤 방식으로 세계 평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공산권 국가와 어떤 정치적 관계를 맺었는지 등과 같은 여러 흥미로운 문제들이 아인슈타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학자였고, 더 구체적으로는 물리학자였다. 그는 평생을 물리학을 위해 바쳤고, 따라서 그의 물리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인슈타인이라는 과학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물리학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이 어떤 인물이었는지가 분명하게 밝혀진 뒤에야,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아인슈타인이나 아버지로서의 아인슈타인, 남편으로서의 아인슈타인의 모습들도 정확하게 밝혀질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은 그 자체로 엄청난 업적이었기 때문에, 그 업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지금껏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아인슈타인을 고독한 혁명가로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적 업적이 갈릴레오 이래로 비롯된 아주 오래된 전통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그의 이론이 당시의 다른 과학자들의 이론적 업적과 어떤 상호작용을 주고 받으면서 형성되었는지, 또한 그의 이론이 그 시대의 물질 문화적 조건들과 어떤 방식으로 공명하면서 등장했는지를 다면적이고 심층적인 방식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여전히 완결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고독한 혁명가가 아니라 고전물리학에 대한 창조적 재해석자였다. 그가 행한 기존 이론에 대한 반성 및 재해석의 과정은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과정이었으며, 그는 참으로 갈릴레오의 가장 위대한 제자였다.

 

과학사통론2 기말보고서(09121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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