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01: 과학혁명이란?

강형구 2016. 4. 8. 06:58

 

제1: 과학혁명이란?

 

데이비드 린드버그, 베이컨에서 버터필드에 이르기까지 과학혁명 개념의 변천사

    

   버터필드는 1949년에 출판된 책에서 과학혁명이 서양의 역사상 일대의 혁명적 사건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과학혁명에 대한 버터필드의 생각은 1980년대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린드버그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보다는, 이러한 주장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이어져왔는지를 계보학적으로 간략하게 보여준다.

 

인문주의와 르네상스(Humanism and Renaissance)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과 같은 15~16세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 또한 버터필드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오랜 어둠의 시기를 깨고 고전적인 예술과 문학을 부활시킨 장본인(instigator)이라고 생각한다. 인문주의자들은 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 천 년 동안 문화적 어둠과 침체(stagnation)가 진행되었고, 고대의 예술과 문학은 기독교적 상징과 교회의 스콜라 학자들의 야만성 아래 굴복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페트라르카는 동시대인들에게서 경멸을 느끼며 고대 그리스인들의 저서를 읽으며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16세기 학자들은 자신들이 일종의 철학적 혁신(renovation)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

    

   이 시기에도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구분하는 삼분법(tripartite)은 여전했다. 이 시기의 주석가들(commentator)은 인문주의의 부활이 확대되고 성장한 결과 새로운 철학이 탄생했다고 인식한다. 버리(Burry)와 존스(Jones)에 따르면, 17세기 학자들은 과거의 유물을 거부하고(repudiate) 철학적 활동과 과학적 활동의 방향을 급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새로운 철학을 통해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실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고 믿는다. 1930년대에 설득력 있게 제시된 17세기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1980년까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대의 저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이와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 구절들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17세기 사람들이 고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은 좀 더 복잡하고 미묘한 뉘앙스(nuance)를 띄고 있었다. 베이컨(Bacon) 또한 표면적으로는 그리스의 학문에 대해 경멸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시기(grudge) 어린 존경심을 보인다. 17세기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대인들이 경탄을 받을 만한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고대에 비견할 만한 혹은 고대를 뛰어넘는 성과를 얻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베이컨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과학이 엄청난 성과를 올리고 있으며, 이는 자신의 새로운 과학적 방법 덕택이라고 주장한다. 17세기의 수많은 주석가들을 베이컨이 주창한 학문 방법론을 따랐다.

    

   이 시기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과연 근대인들은 고대인들을 능가했는가(surpass) 아니면 근대인들은 어쩔 수 없이 고대인들에 비해 뒤처질 수밖에 없는가(theory of universal deterioration)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템플(Temple)처럼 고대의 우월성을 옹호하는 입장은 문명의 진보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보인 18세기의 찬란함(glare) 속에 서서히 가려진다. 18세기에는 근대의 자연철학이 고대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이 확실하게 여겨졌다. 이는 볼테르(Voltaire, 1694-1778)의 저서 속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의 목표는 인류가 무한히 진보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인간의 정신 및 예절(manners), 풍습에 대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었다. 볼테르는 자신의 시대가 경이로울 정도로(prodigious)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콩도르세(Condorcet, 1743-1794)에 이르면 인간 본성의 완벽함에 대한 계몽적인 낙관은 그 정점(zenith)에 달한다. 그에 의하면 세 가지 사건을 통해 기존의 권위가 무너졌고 배움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 첫 번째 사건은 인쇄의 발명으로 이는 권력의 무게 중심을 이동시켰다. 두 번째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 투르크인들(Turks)에게 정복되면서 그 곳에 있던 학자들이 그리스 문학과 과학을 유럽에 유입시킨 것이었다. 세 번째는 신대륙의 발견으로 이는 서양의 지평(horizon)을 넓히고 다른 환경에 속한 인종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5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인문주의자들은 하나같이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면서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고 있다. 과학의 흐름(course)에 대한 이와 같은 인문주의자의 전망이 그토록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러한 인문주의적 전망은 더 정교해지고 풍부해졌으며 더 수준이 높아지기까지 했다.

 

19세기 실증주의(Positivism)와 관념주의(Idealism)

 

   19세기에도 유럽의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구분하는 전통은 이어졌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기에 17세기를 과학혁명이 일어난 시기로 확고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콩트(Comte, 1798-1857)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콩트는 모든 과학이 신학적(혹은 허구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실증적 단계라는 세 단계의 과정을 밟는다고 주장한다. 콩트에 따르면 과학들 각각은 서로 다른 빠르기로 각각의 단계에 도달하며, 이는 역사적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단계를 거쳐서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은 분명하다.

 

   콩트와 동시대인이었던 휴얼(Whewell, 1794-1866)은 콩트와는 다른 철학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콩트가 실증적 과학은 세계의 가시적 측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만 탐구해야 한다고 제한한 반면, 휴얼은 칸트 철학적 영감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과 사실적 자료들 사이의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 과학적 지식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휴얼에 의하면 과학은 인간의 정신이 파편적인 사실들을 일반적인 진리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발전한다. 따라서 과학의 역사는 발전의 연속적 과정이며, 명료한 관념들과 분명한 사실들이 창조적으로 상호작용할 때(이른바 종합의 시기 inductive epoch) 과학은 두드러지게 발전한다. 휴얼은 역사적 탐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과학철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휴얼이 개별 과학들이 보인 진보의 다양한 정도들을 포착하려는 결정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또한 어둠의 시기 이후 16세기에 이르러서 적절한 심적 습관과 방법론을 통해 과학이 부흥했다는 기존의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세 과학의 부흥(Rehabilitation)

 

   19세기까지만 해도 중세가 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황폐한(desolation) 시기였다는 견해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이 상황은 20세기가 시작되면서 달라진다. 뒤엠(Duhem, 1861-1916)은 휴얼처럼 그의 과학철학을 확증하고 보강하기(buttress) 위해 과학의 역사적 사례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숙한 물리 이론이라면 형이상학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현상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며, 중세는 근대 과학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정역학(statics)의 기원을 따져나갔다. 뒤엠의 처음 예상과는 달리, 그는 13세기에 활동했던 네모어(Nemore)의 원고를 살핀 결과 네모어가 정역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있어 레오나르도(Leonardo)와 갈릴레오(Galileo)의 선구자격인 역할을 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뒤이어 뒤엠은 14세기에 활동했던 작소니(Saxony), 주데이(Judei), 뷔리단(Buridan), 오렘(Oresme)의 저작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작업이 근대 과학의 기초를 놓았음을 확신한다. 이에 따라 그는 기존에 과학적 혁명으로 여겨지던 것이 실제로는 느리고 오랜 시간 동안 준비된 진화적 과정(evolution)일 따름이었다고 주장한다. 중세와 근대 초기의 과학이 일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뒤엠의 이러한 주장은 과학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고전적인 시대 구분이 처음으로 심각한 공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중세 과학의 부흥은 뒤이어 하스킨스(Haskins, 1870-1937), 손다이크(Thorndike, 1882-1965) 등을 통해 이어졌으며 손다이크는 기존의 견해와는 달리 15세기에 과학적 활동이 위축되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중세의 과학이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중요한 공헌을 부정할 수는 없게 되었다.

 

 

과학 혁명론자들의 반론

 

   혁명적인 뒤엠의 주장에 대해 거세게 반발한 것은 주로 철학자들이었다. 특히 버트(Burtt, 1892-1989)는 근대 과학의 시초가 중세 시대에 있지 않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버트는 독일 신칸트주의의 영향 속에서, 근대 과학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체계가 기존의 것을 대체하는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버트에 따르면 과학은 점진적인 축적을 통해 진보하지 않는다. 근대 과학의 핵심은 자연을 수학화(mathematization) 한 데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뉴턴 이후의 보충 과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근대과학은 본질적으로 16세기에 시작해서 뉴턴의 시대인 17세기에 종결된 것이다.

 

   코이레(Koyré, 1892-1964) 또한 철학적 관심을 갖고 과학사에 접근한다. 코이레는 카씨러(Cassirer)의 신칸트주의 및 마이에르송(Meyerson)의 영향을 받아, 모든 인간의 지적인 노력에는 근본적인 통일성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과학적 사고와 철학적 사고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과학의 발전이란 철학적, 형이상학적, 종교적인 관념들의 진화와 맞물려 있고 주장한다. 코이레는 버트와 비슷하게 과학혁명이란 지적으로 근본적인 변형을 토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과학혁명의 과정 속에서 하나의 세계는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그 자리를 대체했으며, 세계를 대하는 완전히 새로운 형이상학 태도에 적합하게 근대 과학의 언어와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코이레는 과학이 경험적 방법론을 통해 무한히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는 견해를 격렬하게(vehemently) 반대한다.

 

   코이레는 과학혁명이 철학적 근원을 가진다는 주장의 타당함을 밝히기 위해 과학혁명을 연대기적으로 압축시키려는(compress) 시도를 한다. 그가 생각한 과학혁명의 본질적 변화(mutation)는 공간의 기하학화(geometrization of space)와 관성 원리의 확립이었다. 버터필드(Butterfield, 1900-1979) 또한 과학혁명에 대한 코이레의 견해를 받아들여, 초기 근대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경험적 증거는 당시의 지적 변화가 가지는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비록 버터필드가 과학혁명의 시기를 연대기적으로 더 확장하기는 하지만, 그는 뒤엠이 주장했던 중세 시대의 중요성을 축소시켰다. 버트, 코이레, 버터필드는 과학혁명에 대한 전후 세대들의 학문적 탐구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쳐(Hall, 코헨Cohen, Kuhn, 웨스트펄Westfall)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알렉상드르 코이레(A. Koyré),갈릴레오와 17세기 과학혁명

 

   코이레는 이 짧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첫째, 갈릴레오 이전까지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이 결코 어리석거나 멍청한 학문이 아니었다는 것. 둘째, 위와 같은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으로부터 근대 물리학에 이르기까지는 격렬한 개념적 변형이 있었다는 것. 셋째, 그런 개념적 변형에 있어서 천문학(Astronomy)과 플라토니즘(Platonism)이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 이레는 갈릴레오의 물리학이 혁명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의 물리학이 어떤 의미에서 진정 혁명적이었는지를 개념의 역사를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서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이 그럴싸한 이유를 보자.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에 의하면, 어떤 물체가 정지해 있는 것과 움직이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물체들은 가만히 놔두면 움직이지 않고, 그 물체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특별한 작용()이 필요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하나의 상태(state)라고 한다면, 움직이는 상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상태인 것 같다. 정지해 있는 것은 특별한 부가적 작용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자연스럽고 더 본질적이다. 움직이는 것은 항상 멈추기 때문에, 움직임이란 또 다른 정지 상태로 바뀌는 일종의 변화(change)인지도 모른다. 무거운 물체는 아래로 가서 멈추는 것이 자연스럽고, 가벼운 물체는 위로 가서 멈추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러한 자연적 정지 상태로 가기 위해서 운동(변화)한다. 그런데 지상 세계와는 달리 천상 세계에는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운동, 완벽한 원운동만이 존재한다. 지상계와 천상계는 구분되며, 천상계에는 지상계와는 다른 법칙이 적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의 존재론적 우위를 부정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추상적, 혹은 관념적 속성은 경험적 사실과 분리해서 파악되지 않는다. 어떤 개체의 형상은 각 개체들의 개별적인 특성들 속에서 드러난다. 그 개별적 특성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그 특성들로부터 공통적으로 추상적 속성에 비해 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추상적 속성이 개체들의 특성들로부터 따라 나오는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감각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비수학적이다. 수학적 개념은 우리의 감각 경험을 통한 개념과 일치하지 않으며, 수학을 통해서는 질적 속성이나 변화로서의 운동을 연역해낼 수 없다. 상태 변화로서의 운동, 지상계와 천상계의 구분, 물리적 세계에 대한 비수학적 서술 등의 특징을 보여주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으로부터 근대 물리학에 이르기까지는 일종의 개념적 투쟁이 필요했다.

 

  

   근대 물리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관성의 원리는 이전까지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전제한다. 첫째, 한 물체는 그 주변의 물리적 환경과는 무관하게 분리될 수 있다. 둘째, 공간은 균질한(homogeneous) 무한 유클리드 공간으로 간주된다. 셋째, 정지와 운동은 존재론적으로 서로 동일한 상태로 생각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이전에도 태양중심설 혹은 지구자전설이 제시된 적이 있었지만, 이런 가설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반박되었다. 만약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한다면 지구에 붙들려 있지 않은 물체들은 원심력 때문에 밖으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또한 그러한 회전은 지구에 붙어 있지 않은 물체로 하여금 뒤로 밀려나게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코페르니쿠스는 천상계의 운동 법칙을 지상계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전략을 사용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체가 뒤로 밀려나거나 밖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는 이유가, 그 물체가 지구의 운동에 참여(participation)하기 위해 무리한(violent) 운동(지구의 자연스러운natural 운동과 대비되는)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코페르니쿠스에서 단지 암시되기만 했던 천상계와 지상계의 통합은 죠르다노 부르노(Giordano Bruno)를 통해 분명하게 표명된다. 부르노는 기존의 지구 중심적인 유한한 세계, 지상계와 천상계가 구분된 세계를 무한히 열린 세계로 대체한다. 세계가 무한하다면 그 안에서 지상계와 천상계의 구분, 자연스러운 운동과 무리한 운동의 구분도 사라진다. 다리 위에서 떨어뜨린 돌과 움직이는 배 위에서 떨어뜨린 돌이 궤적의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후자의 돌이 배의 움직임이 갖고 있는 움직이는 성향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티코 브라헤(Tycho Brahe)는 이와 같은 설명의 물활론적이고 의인화된 측면을 비판했다. 어떻게 하나의 물체가 자신이 이전까지 속했던 역학계를 알고 기존의 계가 갖고 있던 특성(관성)을 유지한단 말인가?

 

  

   이에 대해 케플러(Kepler)는 적어도 지구상의 모든 물체들은 무한히 많은 탄성적 사슬(elastic chains)을 통해 지구와 묶여있다고 주장한다. 이 사슬들은 동쪽과 서쪽 두 방향 모두에서 한 물체를 잡아당기기 때문에 이 양 방향의 잡아당김은 서로 상쇄된다. 이러한 케플러의 설명은 지구의 움직임과 물체의 움직임을 함께 고려하게(mixture) 한다. 또한 케플러는 지구의 경우 물체들을 자기적 힘으로 끌어당기지만 배 또는 다른 물체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지구와는 달리 물질적인 속박이 필요하다. 케플러는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의 반론에 대처하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운동 상태가 정지 상태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이 케플러가 근대 물리학에 이르는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못하게 한 결정적 이유였다.

 

  

   코이레가 생각하기에 갈릴레오의 결정적인 발걸음은 바로 경험으로부터의 결별이었다. 이는 갈릴레오가 플라톤주의를 통해서 세계를 새롭게 해석함을 뜻한다. 갈릴레오에게 자연은 감각 지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학(특히 기하학)을 통해서 읽힌다. 자연의 책은 기하학이라는 기호로 쓰여 있다. 갈릴레오는 케플러처럼 탄성적 사슬을 끌고 들어오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배 위에서의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운동의 물리적 상대성(physical relativity of motion)을 원리로서 도입하면서, 그 원리는 실험을 통해 입증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갈릴레이는 기존의 세계관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으로 대체를 해버린다. 이 세계관에서는 모든 물체들이 균질한 무한 유클리드 공간에서 수학적 규칙을 따라 움직인다. 움직임은 수학을 통해 규정될 수 있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대비되는 플라톤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한 자신의 과학은 곧 플라톤의 승리임을 알고 있었다.

 

 

커닝햄윌리엄스, 거대 담론의 초점 바꾸기: 근대 과학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관점

 

   최근 이른바 과학사에서의 거대 담론- 특히 17세기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명명된 과학혁명을 생각할 수 있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버트(Burtt)나 버터필드(Butterfield) 같은 역사학자에 의하면 근대 과학의 탄생은 세계사에서의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이 혁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측면에서나 물질적인 측면에서 그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굉장한 변혁이 필요했다. 하지만 근래의 과학사학자들은, 비록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 때 다소 간의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17세기의 과학혁명은 그 이전 시대의 정신적물질적 준비 과정을 감안할 때 충분히 예견될 수 있었으며그런 의미에서 연속적인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거대 담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진 가운데, 커닝햄과 윌리엄스는 과학사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거대 담론이 필요하며 또 바람직하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그들에 의하면 역사를 해석하기 위한 큰 틀(big frame)을 갖는 것은 중요하며,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틀이 그릇되고 왜곡되었다면 그 틀의 무게중심을 바꾸고 그 규모를 줄이며 그 성격을 수정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커닝햄과 윌리엄스는 현재의 입장이 아닌 과거의 입장에서 볼 때, 기존의 과학혁명개념이 그 개념을 주창했던 사람들의 고유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충분히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중세 시대의 과학, 과학 발전에 있어 사회문화적 요소(factor)의 중요성, 비서구 문화에서의 과학 등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 오늘날, 더 이상 기존의 거대 담론을 수정하거나 그 담론에 몇몇 추가적 요소를 덧붙이는 과정을 통해서는 우리 시대에 맞는 담론을 형성할 수 없다.

 

근대 과학의 기원(origins)에 대한 기존의 관점

 

   근대 과학을 특징짓는 기존의 세 관점이 있다. 첫 번째 관점은 철학적인 것으로, 이 관점에 따르면 과학이란 탐구의 특별한 하나의 방식으로서 보편적인 인과 법칙의 형식을 띤 지식을 생산한다. 특히 물리학의 경우에는 수학의 형식을 빌려 이와 같은 인과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 두 번째 관점은 과학의 본질적 특성을 도덕적 용어를 통해 표현하려 하며, 과학이란 자유합리성진실함선 등과 같은 기본적인 가치들이 구체화된 것이며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진보의 원동력(motor)이었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관점은 과학을 보편적인 인간의 활동으로 특징짓는데, 이에 따르면 세계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호기심은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특성들 중 하나이며 이러한 인간의 특성이 역사적 시간공간에서 발현된 것이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서술된 근대 과학의 특성들은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꽤 의심스러워졌다. 좀 더 자세하고 세분화된 탐구 결과 과학혁명이라는 기존의 거대 담론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 기초가 허약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생명 과학의 경우에는 첫 번째 관점을 정확하게 적용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밝혀졌고, 최근의 과학사적 작업이 맥락(context)' 혹은 외부적 요인을 강조함에 따라 근대 과학에 있어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두 번째 관점도 그 설득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또한 시대에 따라 과학의 특성이 본질적인 측면에서 서로 달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과학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세 번째 관점 또한 유지되기 힘들어졌다.

 

   파이어아벤트(Feyerabend)방법에의 도전(Against Method)에서 과학에는 특정한 하나의 방법이 아닌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해왔다고 주장했고, (Kuhn)과학혁명의 구조(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하나의 과학적 방법론(methodology)은 특정한 과학 공동체가 공유하는 믿음, 가치, 기술, 표준화된 문제(exemplary problems) 등에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현재에는 가치 판단 및 정치경제적 이익과 완전히 무관한 지식이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며, 과학을 추구하는 것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혁명의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기존의 과학혁명개념은 과학의 본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거대 담론이었으며, 특히 1940년대의 문제의식에 잘 들어맞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으로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거대 담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담론을 대체할 새로운 담론을 수립하는 것이다.

 

근대 과학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관점

 

   커닝햄과 윌리엄스는 이른바 혁명의 시대라고 알려진 1760~1848년 사이의 서유럽에서 근대 과학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은 과학이란 역사적으로 우발적인(contingent) 현상이며 특정한 사회 집단의 가치(value)목적(aim)규준(norm)들을 구체화시킨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근대 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원리를 기초로 한다. 첫째, 과학의 기본적인 가치들과 규준들은 그 자체로 당연하게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둘째, 어떤 사회에서든 지식이란 그 사회의 생산물이며, 지식은 그것이 사회에 대해 맺는 관계 및 사회에 대해 갖는 가치를 구체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과학사에 있어 '행위자(actor)'라는 범주(category)를 포함시킨다. 넷째, 과학사에서 등장하는 개별적인 탐구들이 무엇을 묻고자 했고 무엇에 대해 답변하려했는지를 그 시대의 행위자들 입장에서 판단한다.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용어가 아닌 '과학(Science)‘이라는 용어만을 사용해서 자연을 탐구하려는 기획(project)의 정체성을 수립하려는 시도가 19세기 초반에 등장한다. 이 시기는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것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신성한것이 아닌 세속적(secular) 활동으로 여겨졌다. 과학이란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자연 세계를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이었다. 과학이란 자연의 추상적 규칙성들을 발견하고 자연 자원을 이용하기 위한,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을 얻고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진보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러한 과학은 혁명의 시대(Age of Revolution)가 보여주는 하나의 특수한 측면(aspect)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혁명 개념은 정치적 성격(1789년의 프랑스 혁명), 산업적 성격(177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 혁명), 지성적 성격(특히 독일에서 찾아볼 수 있는 후기-칸트적인 지성적 혁명)이라는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세 가지 혁명은 과학의 핵심적인 가치와 목표들- 창조성(genius), 자유로운 탐구(free inquiry), 의견의 자유로운 교환(free exchange of ideas), 객관성(objectivity), 청렴함(disinterestedness) 등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이후로 과학이라는 새로운 기획(enterprise)을 지지하려는 지적 전통(intellectual tradition) 또한 등장한다. 즉 이때부터 그리스인들, 갈릴레오,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등으로 이어지는 과학에 대한 현재-중심적(present-centred) 관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정치사에 대한 휘그적 해석(Whig interpretation)’이 등장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요약하면, 최근의 역사적 연구는 혁명의 시기가 과학이라는 활동을 특징짓는 본질적 특징들(자연에 대한 세속적이고 자유로운 탐구 등)의 기원이라고 여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삶의 특수한(local) 물질적 조건에 대해 인간적인 활동을 통해 반응한 결과 과학의 목표, 가치, 실천(practice) 등이 형성(creation)되었다. 과학이란 갑자기 출현한 것(emergence)이 아니라 고안된 것(invention)이다.

 

거대 담론의 초점 바꾸기

 

   커닝햄과 윌리엄스는 과학의 역사란 상대적으로 더 짧고 국소적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은 넓게 잡아 서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국한해서 대략 250년 전부터 등장한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아이들은 초기에는 완전히 자기중심적으로만 세계를 이해한다. 그러다가 그네들은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장면을 다르게 볼 수 있고, 다른 지식과 흥미와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과학혁명에 대해 이전까지 갖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따라 기존에 갖고 있던 자기중심적 관점을 수정할 수 있다. 과학을 우발적(contingent)이고 비교적 최근에 고안된 하나의 활동(activity)으로 파악하는 것은 우리의 근대적자본적산업적 세계관으로부터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대 담론을 전환했을 때 우리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실용적 지식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론적 지식(혹은 인지적 지식cognitive knowledge)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그런데 지식에는 인지적 지식 외에 관계적 지식(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전달되는 지식, 소집단 안에서 공유되는 지식, 좀 더 큰 사회 혹은 정치 단위에서의 지식 등과 같은 면식적 지식knowledge of acquaintance)이 있다. 관계적 지식을 인지적 지식과 대칭적인 관계 속에서 서술하는 지식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이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대 담론은 우리의 시대, 장소, 문화에 가장 적합하다고 믿는 담론이며, 이러한 거대 담론은 현재의 역사적 탐구에 필요하다.

 

 

 

섀핀, 과학혁명들어가는 말

 

   섀핀(Shapin)은 이 책을 통해 과학혁명이라는 것은 없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과학혁명이라는 구절은 1939년에 알렉상드르 코이레(Alexandre Koyré)가 사용하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사용된 표현이 아니었다. 1954년에 루퍼트 홀(Rupert Hall)과학혁명, 버날(J.D.Bernal)과학과 산업 혁명이 출판되면서 이 표현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급진적(radical)이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irreversible)로 질서를 바꾼다는 의미에서의 혁명 개념은 선형적이고 일방향적인 시간 개념과 함께 발전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의 개념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학문이 구시대적 문화를 근본적으로 뒤엎는다고 생각한 계몽 시대의 철학자들이 쓴 저서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17세기에는 자연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통제할 목적으로 행해진 다양한 문화적 실천들(practices)이 있었고, 그 각각의 실천들은 서로 다른 특성들을 갖고 있었으며 다른 양식으로 변화를 겪었다.

 

   최근의 역사학자들은 개념들을 당대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과학혁명 또한 서구 문화와 사회라는 맥락에서 등장한 특수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과학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가? 역사가들은 과학혁명에서 가장 핵심적인 실천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고, 어떠한 실천이 진정한 지식을 양산했으며 그 시기에 대체 무엇이 본질적으로 개혁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합치된 의견을 갖지 못한 상황이다. 심지어 우리는 17세기의 사상의 역사를 과학혁명을 언급하지 않고서도 매우 그럴듯하게 서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혁명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분명 17세기 과학적 활동을 직접 수행하던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개념들이 다소의 변형과 재정의의 과정을 거치며 여차저차 해서 우리 세대에까지 이어져왔고, 우리는 또한 우리 고유의 관심과 문제의식을 통해 이 개념들에 관심을 가진다. 대부분의 17세기 사람들은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과학적 선지자들(갈릴레오, 보일, 데카르트, 뉴턴..)을 들어보지도 못했으며, 그들은 그런 과학적 선지자들과는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자연 세계를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섀핀은 이 책을 서술하는 데 있어 전제가 되는 자신의 4가지 입장을 서술한다. 첫째, 과학이란 역사상 등장한 사회적 활동이며 그것이 등장한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둘째, 만약 과학이 그러한 것으로 이해된다면, 과학에 대한 이해는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들과 실천들 뿐만 아니라 제도적 형식(institutional form)과 사회적 사용(social usage) 등 과학의 모든 측면들을 포괄해야 한다. 셋째, 사회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을 명확히 구분한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구분 자체를 하나의 탐구 주제로 삼는다. , 그러한 구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 과정(how)과 이유(why)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넷째, 섀핀은 과학혁명의 본질(essence)과 같은 것은 없으며, 과학혁명이라는 문화적 현상의 특정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혁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편파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섀핀은 과학혁명에 있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몇 요소들에 대해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시기에는 자연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지식을 파악하는 방법 또한 기계화시키려(mechanize) 했다. 섀핀은 자연 세계에 대한 지식과 그 지식을 세속화하는 방법의 변화와 관련된 네 가지 사항에 주목한다. 첫째는 자연의 기계화다. 둘째는 자연 지식의 비개인화(depersonalization). 셋째로 자식을 양산할 때 개인의 이해관계(interest)나 정열(passion)을 조절(manage)하거나 제거(eliminate)시켰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넷째, 이렇게 개혁된 자연에 대한 지식을 도덕적사회적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려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