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다시 시공간의 철학으로

강형구 2022. 9. 25. 09:35

   결국 나는 다시 시공간의 철학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이렇게 돌아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학자는 라이헨바흐다. 그러나 리처드 뮬러와 리 스몰린의 책을 번역한 것은 나에게 시공간의 철학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큰 힘을 주었다. 뮬러는 실험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스몰린은 이론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시간 흐름의 실재성을 옹호한다. 그리고 시간 흐름의 실재성은 라이헨바흐의 시공간 철학에서 옹호하는 관점이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라이헨바흐의 논리경험주의 시공간 철학으로 돌아가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공간의 철학을 실체론과 관계론의 관점에서 성찰하는 전통은 제법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미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여 성공적인 이론으로 자리 잡은 이상, 실체론과 관계론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에 관한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적어도 개념적인 차원에서 상대론은 단연 실체론보다는 관계론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문제는 있다. 과연 이 세계에 전혀 물질과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시공간의 계량적 구조(중력관성장의 계량 구조)가 존재할까? 만약 존재한다면, 여전히 상대론적 시공간에 일종의 ‘실체성’이 남아 있는 것 아닐까? 여전히 우리의 물리학 속에는 완전히 기각하지 못한 일종의 ‘에테르’가 남아 있는 것 아닐까? 에테르는 경험적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물리학 속 개념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직관적으로는 이 문제가 아인슈타인의 ‘구멍 논변’과도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해소’될 수도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물리학(자연 탐구)을 하기 위해서 길이, 시간, 질량을 정의한다. 최대한 잘 확립된 자연법칙과 자연 상수를 이용하여 기초 단위를 정의하고자 하지만, 이러한 기초 단위가 근본적인 수준에서 임의적이고 규약적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떤 종류의 과학 이론이든 모든 과학 이론에는 ‘임의적 정의’가 필요하며, 이는 인간적인 산물이다. 이러한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논리적 사실’이라 이를 피할 수 없다. 이와 유사하게, 질량-에너지가 없는 경우에도 중력관성장이 특정한 계량 구조를 띠는 것은, 이것이 마치 기초 단위의 정의처럼 우리의 이론 속에서 불가피한 일종의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론 속에서 경험적 요소와 정의적(임의적) 요소를 식별할 수 있으며, 정의적 요소가 달라진다고 해도 이론의 경험적 내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점-일치’ 논증의 뼈대를 이룬다. 그러나 이론 속 경험적 요소와 정의적 요소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가 동시성의 정의는 가장 빠른 물리적 신호를 요구하며 이 정의 속에 임의적 요소가 논리적으로 개입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 역시 20세기 무렵에서였다. 정의적 요소는 인간이 만든 과학 이론에 불가피하게 개입되는 인간적 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요소를 최소화하여 최대한 세계와 경험으로부터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 과학 이론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기초 측정 물체 혹은 자연 과정에 관한 문제다. 오늘날은 시공간의 계량 구조를 측정하기 위해 예전처럼 강체 막대를 이용하기보다는 자유 낙하하는 질점이나 빛 광선의 운동을 이용하지만, 이때의 질점과 빛 역시 이상화된 물리적 과정이며 다소의 정의적 요소를 포함한다. 그런데 이런 물체나 과정을 물리학에서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물리학이 세계와 닿는 소통의 창구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나의 추측으로는 바로 이곳이 시공간 이론과 양자역학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초 측정 물체 혹은 자연 과정 역시 점차 그 규모가 줄어드는 과정에서 일종의 ‘양자적 현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 장이론적 관점이 적용될 것인지, 만약 적용된다고 해도 장이론의 직관적인 표상을 유지할 것인지 수학적인 구조만을 사용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양자역학을 현상론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 나의 사고는 일종의 한계에 도달한다. 내가 잘 모르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항상 결론은 뻔하다. 나의 공부가 아직 부족하다. 해야 하는 공부는 아주 많다. 그런데 좀 서글프기도 하다. 나도 이미 벌써 마흔이 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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