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해야 할 일을 한다

강형구 2022. 10. 13. 10:07

   어떻게 ‘선험적 종합 지식’이 가능한가? 이것은 18세기를 살았던 칸트의 낡은 물음이고 이 물음이 잘못되었다는 점 또한 밝혀졌지만, 나는 나 자신이 이러한 물음이 가진 직관적인 의의를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인간의 자연과학적 지식이 이토록 자연을 잘 설명하고 또 잘 예측하는 것일까? 과연 우리의 자연과학적 지식이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자연과학적 지식을 획득하고 구축하고 평가하고 교정해나가는 것일까? 나는 이런 현대적인 물음들이 전제하는 기본적인 직관이 칸트의 물음이 유래한 직관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칸트의 물음은 특별하게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뿐만 아니라, 건전한 사고 능력을 가진 일반적인 사람이 던질 수 있는 진지한 물음이라 믿는다. 그래서 내 생각에 칸트의 물음은 민주적이고 보편적이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철학적이다.

 

   칸트는 자연과학을 아주 잘 이해한 철학자였다. 그러니까 자연과학은 칸트의 부업이 될 수 있을지언정 주업이 될 수는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철학을 아주 잘 이해하고 사랑했던 물리학자였다. 다시 말해 철학은 아인슈타인의 부업이었고 그가 자신의 물리학을 추구하기 위한 좋은 자극과 동기를 제공했지만, 그의 주업은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의 계보 위에 있다. 이들은 철학을 잘 이해하고 사랑했고 자신들의 과학 탐구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지만, 이들 삶의 주된 목표는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칸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의 계보 위에 있고, 내가 전공한 과학철학자인 라이헨바흐 역시 이 계보에 속한다. 이들은 자연과학을 잘 이해했고 철학적 탐구가 자연과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지만, 이들의 주된 목표는 좀 더 성찰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하고자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해’하기를 원했다. 더 정확하게 말해,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제1의 목표였다.

 

   나는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라이헨바흐의 계보 위에 있다. 그러니까 나는 자연과학에 큰 관심을 가진 철학 연구자이지, 철학에 큰 관심을 가진 자연과학자가 아니다. 당연히 나는 자연과학자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애정을 품고 있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바는 자연과학 탐구가 아니다. 나는 자연과학으로부터 비롯되는 좀 더 성찰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답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다. “왜 나는 숨 쉬고 있을까?” 이런 퍽 이상한 질문에 정확하게 답변할 수 없어도 모든 사람은 숨을 쉰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연과학에 대한 성찰적 질문들에 정확하게 답변할 수 없어도 자연과학은 잘 작동해왔고, 잘 작동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작동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에 대한 성찰적 질문들을 던지고 이에 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고 부자여서 굳이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을 수도 있고, 생계를 위해 렌즈를 깎거나 외교관이 되거나 법률가가 되거나 역사서를 집필할 수도 있다. 개인 교사, 도서관 사서, 초등학교 교사, 통신공학자, 과학관 연구원으로 일할 수도 있다. 간혹 운이 좋으면 대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에 소속되어 삶을 영위할 수조차 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직업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적 탐구보다는 이에 관한 철학적 탐구에 주된 관심을 둔 사람들은 지구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나 또한 이런 부류의 사람 중 하나다. 나는 살아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렇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고,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재능이 뛰어나든 그렇지 않든,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나에게는 내가 할 일이 있고 나는 그 일을 한다. 그리고 결국 내가 하는 일은 주로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물론 최종적으로 나는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해가 되지 않고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