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시행착오 대장

강형구 2022. 11. 19. 16:33

   학위논문 수정을 하면서 참 많은 것을 느낀다. 그중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참으로 시간과 공간에 관한 철학적 논의의 전통이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국내의 연구 전통이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으니, 연구 과정에서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며 온갖 시행착오들을 겪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내 생각에 만약 내가 시간과 공간의 철학적 논의 전통, 특히 상대론적 시간과 공간에 관한 철학적 논의 전통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소화해서 이에 관한 정식 연구서를 우리말로 출판한다면, 오직 이것만으로도 진정 우리나라 과학철학계를 위한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실로 내가 맨땅에 여기저기 머리를 박으면서 연구를 해나가고 있다고 느낀다. 진행 속도는 참으로 더디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씩 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시행착오 과정에서 확실하게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철학 분야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확립하려면 무모하더라도 계속 부딪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의 입장에 동의하지 말고 계속 의심하고 반대하고 문제 제기하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자신의 관점을 정련해야 한다. 그러니까 철학자가 되려면 계속 생각으로 싸워나가야 한다. 생각을 통해 싸우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철학자가 될 수 없다. 내 생각에 이것이 진정 철학의 어려운 점이다. 왜냐하면 생각의 싸움이 어렵고 힘들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머리가 좋다면, 이미 확립된 이론이나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적용하는 요령을 반복 숙달하는 게 훨씬 쉽게 느껴질지 모른다.

 

   또 하나 느끼는 것은 내가 ‘턱걸이 과학철학 연구자’라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내가 생각해도 좀 애매한 과학철학 연구자다. 과학철학에서 무슨 문제가 중요한지, 어떤 관점이 비교적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직관이 나에게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내게 그런 얄팍한 직관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지적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큰 문제다. 고약한 것은 그런데도 나에게는 괜한 고집과 끈기가 있어, 포기할 듯하면서도 결코 철학 연구를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안정적으로 잘하는 뛰어난 사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처럼 겨우겨우 힘겹게 철학을 이어 나가는 사람이 문제가 된다. 나도 내가 정말 속 시원히 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 잘 안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내가 얼마나 헤매고 있는지는 논문 수정 과정을 봐도 그렇다. 예비 심사를 하기 전에 지도교수님과의 의견 교환을 통해 논문의 전체적인 수정을 이미 한 번 했다. 그런데 예비 심사를 한 이후에,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의견을 듣고 다시 논문을 전체적으로 수정하고 있다. 이건 분명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수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지적이 합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수정을 통해 논문 주제에 대한 나의 철학적 관점이 대폭 변경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심사를 통해 나의 관점이 더 선명하게 되고 내가 반대하는 관점을 내가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리만의 1854년 강연이 있다. 이 강연에서 리만은 두 개의 핵심 통찰을 제시했다. 리만의 통찰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통찰은 진실로 중요했다. 헬름홀츠와 푸앵카레가 이 통찰을 이었는데, 헬름홀츠가 경험주의적 관점을 취했다면 푸앵카레는 규약주의적 관점을 취했다. 아인슈타인은 헬름홀츠의 관점을 따라 사고하며 자신의 상대론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이 형식적 완결성을 갖기 위해서는 정식 수학 이론이 필요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패러데이에서 시작한 장 이론 프로그램을 끝까지 추구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경험과의 직접적 접촉을 포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때 이런 그를 철학적으로 지지해 준 것이 푸앵카레였다. 그러나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야만적이고 과감한 통찰은 경험적 사고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역사를 보면 늘 야만적이고 새로운 통찰은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경험의 특정한 측면들에 주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어쩌면 이는 계속 되풀이되는 역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