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의식이라는 꿈 속에서

강형구 2021. 8. 22. 10:53

   [의식이라는 꿈]이라는 책을 알게 된 것은 올해 6월 국립과천과학관에서 근무하는 한 연구사님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다니얼 데닛이 쓴 이 책을 내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박사님께서 번역하셨다는 사실 또한 그때 알았다. 이후 나는 이 책을 사거나 빌려 읽지는 않았지만, 책의 제목 “의식이라는 꿈”은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주체의 입장에서 의식은 아름다운 하나의 꿈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게 여겨졌다. 이 표현이 주체의 나르시시즘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이런 나르시시즘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

 

   We are always in our sweet dream. Its name is “consciousness”. 의식은 꿈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는 도구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그 생명을 유지하는데, 이 상호작용의 가장 표면에 있는 것이 의식이다. 식물에도 의식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 돼지, 개와 같은 동물들에게는 의식이 있는 것 같고, 어류나 파충류에게도 인간의 것과 비슷한 의식이 있는 것 같다. 생명체가 진화의 과정에서 의식이라는 생존 도구를 발전시켜온 것으로 추측되지만,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의식이 형성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왜 의식이 꿈인가? 꿈과 의식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거나 비슷한 것이라는 말인가? 제목 “의식이라는 꿈”이 나를 매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철학이라는 학문의 매혹과 유사하다. 우리는 대개 우리의 의식을 통해 파악하는 세계가 객관적인 세계이고 우리가 밤에 잘 때 꾸는 꿈속 세계를 허구적인 세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의식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 이 모든 것 역시 꿈처럼 일종의 허구이고 가상일 수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데카르트적인 의심을 극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되려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의식은 어떤 점에서 가상적이고 기만적인가? 그런 가상적이고 기만적인 특성이 인간의 생존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그런데 실재하는 것과 가상적인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이자 또 하나의 허구적 분류일 수 있다. 과연 우리가 우리의 의식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텍스트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모든 것은 텍스트이다. 의식을 설명하는 과학 역시 의식에 기반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의식이 꿈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우리의 의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규칙적이고 객관적인 요소들을 그렇지 않은 요소들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경험주의자는 그와 같은 규칙적이고 객관적인 요소들을 외부로부터 인간의 의식에 주어지는 경험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나의 의식에 현상하는 외부 세계에 대한 그림이 상당히 정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확실하다. 그러나 이 때의 확실성 역시 확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이라는 꿈”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생생하고 확실하게 지각하고 있는 나의 의식 중 상당한 부분이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와는 비교적 독립적인 별도의 목적을 위해 설계되어 작동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나에게 낯섦과 신선함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의식을 가진 내가 지금 이 순간 나의 신체와 함께 나의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우리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 있는가? 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느끼게 되는 즐거움이나 고통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 있는가? 나는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자연과 더불어 사회 또한 모든 인간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종의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적 담론의 전제가 된다.

 

   나는 오늘도 나의 의식 속에 있다. 설혹 그것이 일종의 ‘꿈’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의식은 내가 살아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나의 ‘필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