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아마추어 과학철학자의 일상

강형구 2021. 6. 12. 20:29

   과학관에서 연구원이자 학예사로 일을 하면, 연구도 하고 행정도 하게 된다. 연구를 하더라도 나의 전공 분야만 연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올해 나는 나의 업무와 관련하여 한국 전기전자산업사와 대구·경북 지역 의학사를 연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의 세부 전공 분야가 아니라 세부적인 내용들은 잘 모른다. 그래서 관련된 책들을 사서 읽으면서 나름대로 공부하니 제법 재미가 있다. 올해 가을에 전자제품 특별전이 계획되어 있어, 어떻게든 열심히 읽고 정리해서 전시 콘텐츠를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이다.

 

   연구와 무관한 행정적인 일들도 꽤 많다. 예를 들어 출장을 갔다 오면 출장결과보고서를 써야 한다. 물품을 하나 사려고 하면 구입 계획, 검사검수 보고서를 결재 받고 지출 결의를 올려야 한다. 조달을 하려고 하면 조달 공고를 올리고, 제안서 평가를 하고, 선정된 업체와 협상을 해야 한다. 위원회를 개최하려고 하면 개최 계획을 결재 받고 외부 위원들을 섭외해야 하고 위원회 개최 후에는 결과 보고를 하고 외부 위원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극히 소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일을 하다보면 연구보다는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할 때가 많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의 정보화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대학 도서관에 온라인으로 접속하면 어지간한 해외 학술지들의 논문들은 다 읽어볼 수 있다는 데 있다. 나는 틈틈이 대학 도서관에 온라인으로 접속해서 나의 전공 분야와 관련된 논문들을 찾아본다. 10년 전에는 토머스 리크먼(Thomas Ryckman)이라는 학자가 눈에 쏙 들어왔었다. 『상대성의 지배』(The Reign of Relativity)라는 저서로 유명한 리크먼은 아인슈타인에 대한 철학적 전기를 쓴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10년 전에는 스탠퍼드 대학의 강사였지만 지금은 같은 대학교 철학과 교수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의 눈에 쏙 들어오는 학자는 마르코 지오바넬리(Marco Giovanelli)다. 최근 이 사람이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논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아주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고, 충분히 대적할 만한 학자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나는 리크먼과 지오바넬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무명의 아마추어 과학철학자에 불과하다. 여유 시간에 출력한 논문을 틈틈이 읽고 요약하는, 집에서는 세 아이들을 키우느라 허덕대다가 아주 가끔씩 카페에 나가 커피를 마시며 논문을 마저 읽고 정리하는 무명의 과학철학 애호가인 것이다. 아직은 한글로 된 논문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어, 영어로 된 논문 쓰기는 우선 한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진지하게 고려해보기로 했다.

 

   나의 전반적인 문제의식 혹은 불만은 이것이다. 20세기 이후 수학과 물리학이 너무 전문화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최근의 물리철학 논문들은 대개 물리학의 이론적 성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특정한 철학적 논증을 비판하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나는 이러한 방법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본다. 철학적 사고와 기준이 먼저 제시되고, 이를 토대로 물리학의 이론적 내용들을 분석하고 평가해야 한다. 물론 이런 분석과 평가 과정에서 물리학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원리, 철학적 기준이 먼저 제시되어야 한다.

 

   어이쿠. 무명의 아마추어 과학철학자인 내가 이런 주장을 할 자격이 있겠나. 6월 15일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원고 작업이나 열심히 하자. 6월 15일 오전에는 코로나 백신 주사를 맞고, 오후에는 백신 주사의 힘을 빌려 원고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나로서는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이 휴식을 취하는 것이므로, 접종 당일 휴가(공가)를 쓰는 보람이 있는 셈이다. 완전히 엉터리인 글을 쓰면 안 되므로 열심히 힘을 내서 글을 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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