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독학하는 사람

강형구 2021. 6. 29. 20:49

   요즘은 직장에서 일하느라, 집에서 애들 보느라, 박사학위 논문 작성하느라 도서관에 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나라는 사람을 키운 것은 매일 도서관에서 죽치고 앉아 책을 읽던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때 그랬고 대학 때 그랬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가서 책을 한 권 골라 계속 읽다가, 피곤하면 밖으로 나가서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몸 좀 푼 다음,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가서 읽던 책을 계속 읽었다. 도서관 식당에서 먹는 밥은 가격도 쌌다. 저녁때까지 책을 읽고 집으로 돌아가면 왠지 모를 성취감이 느껴졌다. 물론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나는 수업에 관련된 책을 읽지는 않았다. 그냥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나름대로 착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것들을 충실하게 이행했고 지금도 이행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했고, 군대를 다녀왔고, 취직을 해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셋 키우고 있다. 부당하게 돈을 벌지 않고, 남에게 해가 되는 일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나도 고집스럽게 지키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지적인 독립성이다. 지적인 독립성이란 스스로 충분히 이해하는 것만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는 않겠다는 태도다. 지적인 독립성은 내가 유일하게 누려 온 사치이자 자유다.

 

   나는 지적인 독립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모범생이 되겠다는 욕심을 버렸다. 나는 대학을 정확히 4년 만에 졸업했다. 학점이 잘 나오지 않아도 재수강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겨우겨우 취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학점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불성실한 내가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게 여겨진다. 40개월 동안 육군 장교로 복무하면서도 나는 시간이 나면 늘 홍천도서관에 가서 죽치고 앉아 책을 읽었다. 내가 학점이 좋았던 것은 석사과정 시절뿐이다. 직장 생활과 학업을 병행했던 박사과정 시절의 학점 또한 별로다. 그러니까 나는 학자로서의 자질이 썩 좋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그래도 깡은 있었다. 나이 서른에 학부시절 수업 한 번 들어본 적 없던 법학, 경제학, 행정학을 공부하며 취직 준비를 해서 회사에 겨우 입사했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책들을 번역하고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지금은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이렇게 힘겹게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지 않은가. 맞다. 나에게는 깡이 분명 있다. 그러나 깡이 있다고 해서 나의 학문적 자질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모범생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주로 독학하며 지적인 독립성을 추구하긴 하지만, 결코 학문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으며 모범생인 삶을 살고 있지도 않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런 독립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생긴 대로 살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말고, 더 나아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좋을 것이다.

 

   나에게 박사학위는 통과의례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모범생이 아닌 나는 박사학위를 받아도 대학교수가 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박사학위는 내게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박사학위란 그저 지금까지 내가 비교적 줏대 있게 오래도록 연구해 온 것에 대한 조그만 보상이 아닐까. 마라톤으로 따지면 4시간 만에 도착점에 다다른 것, 참가자 100명 중에 80등정도 한 것 아닐까.

 

   다시 도서관 이야기로 돌아오자. 박사학위를 받고, 아이들도 커서 더 이상 아빠랑 노는 게 재미없어지는 시절이 오면, 나는 예전처럼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갔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삶을 살고 싶다. 물론 그런 삶은 주말이나 휴가 때만 잠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먼 훗날 직장에서 은퇴를 하게 되면 좀 더 자유롭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별다른 사심 없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그런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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