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과학관에서 학예사로 살기

강형구 2018. 5. 15. 22:04

 

   대학원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했던 내가 학교를 나와 처음 취직한 곳은 공공기관인 한국장학재단이었다. 한국장학재단에서 56개월 일한 후, 나는 나의 전공을 살리고 좀 더 나답게 살기 위해 작년 7월에 국립대구과학관으로 이직했다. 이직한 나를 맞아주었던 것은 수장고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던 32점의 구식 저울들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이 저울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계속 저울들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책도 읽고 하다 보니 저울들에 숨겨져 있는 여러 이야기들을 찾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내 나름대로 풀어내어 저울, 질량을 말하다라는 어설픈 첫 전시를 열었다.

  

   최근에는 !!! 세상을 흔들다라는 제목의 지진재난특별전을 시작했다. 대구경북 지역의 거점 국립과학관인 대구과학관에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지진을 주제로 삼아 자체 기획전시를 마련한 것이다. 전시 기획과 콘텐츠, 전시품 제작을 맡은 나는 지진에 관련된 다수의 책들을 읽었다. 지진에 대해 전시하고 있는 국내 여러 박물관과 과학관을 방문했다. 기상청, 지질자원연구원, 경북대학교, 일본과학미래관으로부터 협력을 얻었다. 기상청에서는 지진 콘텐츠와 VR 프로그램 및 트릭아트 전시품을 구했고, 지질자원연구원에서는 최신 지진계를 포함한 지진계 6대를 빌렸다. 경북대학교에서는 최신 지진 연구 자료를 얻었고, 일본과학미래관에서는 일본에서 일어난 최근의 지진 사진 및 이에 대한 설명을 구했다. 또한 나는 지진 관련 핵심 내용을 담은 5개의 전시품을 고안하여 제작했다.

  

   국립대구과학관에서 과학기술자료를 수집, 조사, 보존, 연구, 전시하는 역할을 맡은 나는 최근에 농기계를 가르치셨던 명예교수님으로부터 전통 농기구 80여 점을 기증받았다. 이 농기구들은 과학관 내에 있는 대구경북 과학기술자료 연구실에 보관되어 있다. 올해 가을에는 기증품 농기구들을 활용한 특별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다. 지진재난특별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나는 새로운 전시를 준비한다. 농기구에 관련된 책들을 읽고, 국내에 있는 농업박물관 혹은 농경문화관에 방문한다. 틈틈이 기증받은 농기구들을 청소하고 다듬은 후 예쁘게 사진도 찍어야 한다. 농기구 특별전이 끝나면, 아마도 대학에서 쓰던 물리 실험기기들을 기증받을 것이기에, 물리 실험기기를 주제로 한 특별전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학예업무를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국립대구과학관으로 이직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과학과 관련된 학예업무를 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학예업무의 전통이나 전문성은 아직 과학관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과학관의 연구 인력이 다른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연구 인력에 비해 높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현실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전통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헬레니즘 시대의 뛰어난 과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소속되어 연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Museum에서 일하며 학문의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은 고대 이래로 고귀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그러한 고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또 하나 나의 마음에 드는 것은 내가 과학과 관련된 실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현장속에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과학관에서 최첨단의 과학 연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관은 과학과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들을 사람들 앞에서 풀어내고 이를 통해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실천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 속에서 내가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 참여하며 이 공간을 운영하고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이는 대학이라는 공간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종류의 경험이다. 실제의 현실은 우리가 상상한 것이나 책에서 읽은 것보다 미숙하고 부족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속에서 실제로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고 새로운 무언가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일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듭 읽어 느끼는 기쁨  (0) 2018.11.20
뛰어나지는 않되 독립적인 개인  (0) 2018.05.20
2018년 서울여행(4)  (0) 2018.02.18
2018년 서울여행(3)  (0) 2018.02.18
2018년 서울여행(2)  (0) 2018.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