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뛰어나지는 않되 독립적인 개인

강형구 2018. 5. 20. 12:37

 

   나는 나 스스로를 사람에 비유하는 것보다는 다른 동물에 비유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나 자신을 덩치가 중간만한 야생 곰으로 생각하곤 한다. 곰 한 마리를 키우기 위해 어미 곰과 애비 곰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상상해보라. 실제로 곰 같은 나를 키우기 위해 나의 부모님은 적지 않은 고생을 하셨다. 나는 곰처럼 우직하면서 고집이 세고 독립심도 강한 편이라, 대학 이후에는 그럭저럭 나 스스로 내 앞가림을 하며 살아왔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볼품 있고 영리한 곰인 것은 아니다. 다만 생존을 다른 생명체에 의존하지 않으며, 부유한 상태에서 종속적으로 살기보다는 가난하면서도 독립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평범한 한 마리의 야생 곰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비유일 뿐이라, 다른 비유를 사용하여 나를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마치 내가 양계장에서 사육되는 한 마리의 닭과 유사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현대 사회라는 거대한 양육 체계 속에서, 잘 손질되고 포장되고 단순화된 각종 정보들과 음식들을 섭취하며 육성된, 사회의 쓸모를 위해서 오랜 기간 동안 소모되는 평범한 하나의 개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여 나를 비롯한 이 사회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 다소 편리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 비유는 앞에서 든 비유보다는 덜 적절한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모든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아주 힘들고 처절한 과정을 거쳐서 자라난다고, 그렇기에 그 어떤 사람도 아주 힘겹고 힘겹게 살아남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인간이 성인이 되기까지 살아남는 생존율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고 하더라도, 나는 모든 사람이 100명 중에 겨우 살아남은 1명의 개체로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취급받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인간에게는 동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본능과 비합리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고도로 본능적이고 비합리적인 어떤 개체로부터 특정한 종류의 합리성이 생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고독함, 집요함, 종교와도 같은 믿음 혹은 광기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 이들은 분명 다른 거인들의 힘을 빌렸으되 스스로의 힘으로 고집스럽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일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움직였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바꿀 수 없는 확고한 독립성의 기원은 무엇일까? 이러한 독립성 역시 진화의 산물로 설명하려고 시도할 수 있겠지만, 그와 같은 설명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희화화 된 하나의 스케치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만약 신이 독립성과 탁월함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나는 독립성을 선택할 것이다. 또한 나는 독립적인 개인들 속에서 진정하게 탁월한 사람이 탄생할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 인간 자체가 똑똑한 종류의 생물이기도 하고, 뛰어난 지성이 사회 속 생존에 유리하며 더 나아가 사회가 다른 사회와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똑똑하면서도 종속적인 사람들, 똑똑하고 잘 훈련된 개와 같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 다수 존재하며 사회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나를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 속에 포함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잘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본능이 말하는 바다. 다만 내게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이와 같은 본능을 가진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오랜 역경을 뚫고 힘겹게 살아남은, 제법 노련한 한 마리의 야생 곰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금빛으로 치장하고 질 좋은 고기로 포장된 우리 속에서 살기 보다는, 산 속에서 물고기와 산짐승들을 잡아먹으며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개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