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삶이라는 야전에서

강형구 2017. 10. 2. 20:29

 

   호랑이에게 너는 왜 호랑이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비슷하게, 바퀴벌레에게 너는 어쩌다가 바퀴벌레로 태어났느냐고 묻는 것 역시 우스운 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눈을 떠 보니 나는 이 세상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했고, 열악한 상황을 모면하거나 나보다 더 강한 자를 피해서 도망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치욕 속에서 이를 견디며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했고, 때로 승자가 되었을 때는 패자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며 짜릿함을 느꼈다.

  

   나는 대략 5천만 명의 인간 개체들로 구성된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우리 사회가 제시하는 제도적인 관문들을 거치며 지금 여기 이 자리까지 왔다. 돌이켜보면 나는 생명체로서의 본능을 활용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19살까지는 부산에서 부모님의 비호를 받으며 살았고, 20살부터 군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수도권에서 친척들과 함께 살았다. 나는 참 눈치도 없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내 나름의 생존 본능을 발휘하면서 삶의 단계들을 견뎌왔다. 야만적이고 무식한 방식으로 공부를 했던 내게 대학을 졸업하는 것은 아주 큰 난관이었다. 그렇다. 나는 실로 야만적으로 공부했다. 나의 공부는 학식 있고 세련된 사람이 하는 것과 같은 공부는 아니었다.

  

   공부는 야만인인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자산이었다. 강원도 홍천에서 근무를 할 때, 주말마다 홍천도서관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시간은 나를 나이게끔 해주었고 내게 살아갈 힘을 주었다. 대학원에서의 공부는 야만인인 나 스스로를 문명화시키고 교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대학원에서 받은 학위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활용될 수 있는 전략적 자산이었다. 나는 군대로 비유하면 중앙부대와는 별도로 운영되는 독립부대와 비슷하며, 동물로 따지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맹수와 같다. 독립성은 내가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세력을 얻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하려는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거의 나밖에 없었다. 나의 문제의식, 나의 취향은 내가 원해서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내 모든 것을 바쳐서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나는 나의 문제의식과 취향이 무엇인지 깨달았지만, 그것은 흔한 것이거나 다수의 것이 아니었다. 이는 내가 바랐던 바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삶이라는 야전에 영원한 평화는 없고 무너지지 않는 성 또한 없다. 이 세상에서 35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나와 아내, 딸이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또한 내가 추구하는 공부를 해 나갈 수 있는 여건 역시 마련해두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하나의 전통으로 만들었다. 내가 대구에서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20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형성된 과학적 철학의 전통이 대구라는 지역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전통을 말살하고 싶은 사람은 대구로 나를 찾아와 나의 목숨을 끊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내가 옹호하려는 전통은 무력, 권력, 재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의 원망을 사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강력한 무력, 권력, 재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나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지켜야 하는 하나의 철학적 전통이 내 삶, 내 운명과 함께 있다. 나는 이 전통의 수호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만약 내가 60세 이상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는 이 전통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활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이루어 놓을 수 있으리라. 내 삶을 통해 과학적 철학의 전통은 한국어라는 언어 도구의 힘을 빌려 책이라는 물질의 형태로 보전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노력은 나의 가족을 포함한 나의 민족을 위한 것이다. 이는 고귀한 문화적 전통을 보전하려는 사람들의 노력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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