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오래된 꿈이 찾아오다

강형구 2017. 1. 20. 18:08

 

   내게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적은 있다. 내가 입학했던 학교는 부산과학고등학교로, 지금은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나는 1998년에 입학했던 8기 학생이다. 역설적이지만 고등학교를 그만 둔 나는 훗날 과학고등학교의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은 주입식으로 수학, 물리학 등과 같은 교과목들을 배웠지만, 훗날 내가 과학고등학교에 부임하게 된다면 과학의 역사와 사상을 곁들여가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그만 둔 내가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을 방문해서 구했던 것은 교사용 지도서였다. 교사용 지도서에는 해당 교과목의 역사나 설명자료 등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참고자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수학교육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특히 우정호 교수님의 책들을 자주 보았다. 과학교육, 수학교육에 관심을 가진 소수의 선생님들은 과학교육에서의 과학사과학철학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계신 듯했다. 라카토슈가 쓴 책인 [수학적 발견의 논리] 역시 우정호 교수님에 대한 관심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 후 라카토슈에 관심이 생겨 그의 다른 책 [수학, 과학 그리고 인식론]을 도서관에서 찾아 읽었다. 그러니 나는 포퍼보다는 라카토슈에 먼저 접했던 셈이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 일관되게 변하지 않는 나의 생각은 이것이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학생들이 과학을 이해하고 과학에 관심을 갖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과학자들이 과학적 실행을 할 때 좋은 지침 혹은 참고가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과학교육과 과학실행에 유익할 필요가 있다. 과학교육과 과학실행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과학사과학철학 문헌을 읽을 때마다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러한 논의가 과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나? 만약 도움이 된다면, 훗날 이러한 도움을 통해 과학사와 과학철학이 우리나라의 과학 생태계를 바꿀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만약 내게 다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분명 사범대학에서 수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리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과학의 역사와 사상을 공부하리라.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했다. 살아가기 위해 취직을 했고, 매일을 직장에서 보내고 있다. 그러던 내게 생각하지 못했던 기회가 찾아왔다. 대구과학고등학교에서 과학철학을 강의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최근 영재학교로 전환된 대구과학고등학교는 교과과정을 편성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갖게 되었고, 2017년부터 학생들을 위해 과학철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한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이 과목을 강의할 수 있는 적당한 사람을 찾기 힘들어 했고, 우연히도 지인을 통해 나에게 연락이 왔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학교에서도 과학철학 강의를 위해서 정식교원을 뽑으려는 것은 아닌 듯하여, 아마도 나는 강사로 활동할 것 같다. 먼 훗날 정식교원을 뽑게 된다고 해도 아직 나에게는 자격이 없다. 나는 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직장에서 강사로 활동하는 것을 승낙해준 것도 아니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려고 하다가 나 스스로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무척 설렌다. 아주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것이 느닷없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꿈을 잊어버리지 않고 간직하기를 잘했다. 가끔씩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운이 찾아오기도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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