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캐펠렌&르포, [맥락과 무관한 의미론] 요약 정리 03

강형구 2016. 7. 4. 05:48

 

캐펠렌(Cappelen) & 르포(Lepore), 맥락에 무관한 의미론11

  

   저자들에 의하면, ‘붉다’(S1), ‘춤추다’(S2), ‘충분히 먹다’(S3), ‘준비되었다’(S4), ‘비가 온다’(S5), ‘키가 크다’(S6) 6가지 표현이 포함된 문장에 대한 발화를 통해 제시되는 명제는, ‘A는 붉다등과 같이 해당 표현이 포함된 문장 그 자체이다. 또한 이러한 문장의 진리 조건도 ‘A가 붉은 그 경우에만 참이다와 같다. 저자들은 최소 명제에 대한 형이상학최소 명제의 인지 심리학적이고 의사소통적인 역할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자에 대해 살피는 11장에서는 의미론이 형이상학과 분리되어야 함을 보이려 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의미론적 최소 명제인 사과는 붉다는 것은 그저 사과가 붉을 때 참이며, 이 문제를 더 이상 따지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붉다는 것은 그저 붉은 것을 뜻하며, ‘붉다라는 표현에는 추가적으로 채워져야 할 그 어떤 논항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붉다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 붉다라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는 다양한 사용들에 공통적인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지 않는가? 저자들은 이러한 질문을 무엇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느냐 하는 질문(CQ)’이라고 명명하며, 이러한 질문은 형이상학과 관계된 것이지 언어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언어에만 해당되는 붉음과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사물에 해당되는 붉음을 구별해야 한다. 붉은 것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려는 답변에서도 붉다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이는 이에 관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시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설령 붉음이 맥락의존적이라 가정한다 해도 이는 붉음에 대한 CQ에 답변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유사하게, ‘춤춘다는 표현이 공통적으로 갖는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도 의미론적 문제가 아니며, ‘춤춘다는 것이 맥락의존적이라 해도 역시 이에 대한 CQ에 답변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만약 붉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안쪽이 붉다’, ‘물 속에서 붉다등과 같은 표현들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안쪽이 붉다의 경우에도 이에 관련해서 가능한 수많은 경우들이 있으며(‘안쪽이 붉은 사과’, ‘안쪽이 붉은 사람’, ‘안쪽이 붉은 가스), ‘붉다안쪽이 붉다라고 구체화시킨다고 해도 여전히 이 표현이 갖는 애매모호함이 붉다와 같은 수준으로 상존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그들이 형이상학적 무정부주의(허무주의)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언어철학에서도 형이상학적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이기는 힘들며,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자들이 답변하도록 놔두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형이상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A는 붉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들은 자신들의 발화에 대한 의미론적 진리 조건을 모른 채 발화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저자들은, 형이상학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우리는 의미론적으로 표현되는 명제 및 의미론적 진리조건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답변한다.

  

   하지만 준비되었다’, ‘충분히 먹었다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러한 표현들은 앞서 살펴본 표현들인 붉다’, ‘춤추다와는 다르지 않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저자들은 이 표현들 또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은행 강도짓을 할 준비가 되다’, ‘저녁 식사를 할 준비가 되다’, ‘시험을 볼 준비가 되다등과 같은 표현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러한 논란이 최소주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며, 맥락주의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 논란을 해결할 수는 없다. 만약 준비되었다라는 표현에 형이상학적 문제가 제기된다면, 동일한 문제가 시험에 대해 준비되었다등과 같은 표현에 대해서도 발생한다. 이 표현에 대해서 또한 시험을 평가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준비되었다등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해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키가 크다라는 표현은 비교 대상이 있어야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이 또한 형이상학적인 의문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입장이다. ‘키가 크다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 비교 집합제시, 비교의 척도가 되는 특권적인 집합을 제시, 비교가 이루어지는 시간공간구체적 상황 제시’, 모든 사물들의 평균 크기보다 커야지만 이 표현을 사용 가능함 등과 같은 다양한 조건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키가 크다에 대한 이러한 해명은 형이상학적 문제이지 의미론적 문제가 아니며, 만약 키가 크다라는 표현에 대해 형이상학적 문제가 제기될 경우 ‘F로서 키가 크다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라는 게 저자들의 논변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기린으로서 키가 크다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다양한 비교집합 설정(특정 기린 근처에 있는 기린들, 모든 살아 있는 기린들 등), 다양한 상태 설정(태어난 직후의 기린, 죽었을 때의 기린, 임신했을 때의 기린 등) 및 다양한 해석들(목을 쭉 폈을 때 귀 끝에서 발 끝 사이의 높이, 목을 쭉 폈을 때 코 끝에서 발 끝 사이의 높이 등)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논변은 빠르다와 같은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이는 비교집합을 제한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불충분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