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 9

Becoming a Real Reichenbachian

거듭 생각하는 것이지만, 세상의 아주 많은 일들은 우연을 계기로 이루어진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한 서점에서 라이헨바흐의 책을 발견한 것도 우연이고, 부족한 실력이지만 계속 공부하여 과학철학 박사 및 교수가 된 것도 우연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지금까지 변두리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변두리란 중심과는 상반되는 개념어이다. 쉽게 풀어 말하면, 나는 지금껏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일보다는 남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을 해왔다.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억지스럽게 블루오션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정말 흥미롭고 진짜인 것을 발견했는데, 단지 그게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라이헨바흐도 그렇다. 내 생각에 라이헨바흐는 칸트만큼이나 ..

생애 최초의 학술상 수상 후

나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중학생 때까지 받았다고 기억한다. 실제로 중학교 때 나는 시험을 보면 전교에서 1등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공부 잘하는 학생’에서 ‘공부를 적당히 혹은 잘 못하는 학생’으로 바뀌었다. 주변에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주변에는 서울대에 입학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서 나는 평균 혹은 중상 정도의 성적이었다. 그러니 나 스스로 ‘잘한다’는 생각을 잘 못했다.    당연히 대학에서도 나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물론 나도 장학금이란 것을 몇 번 받기는 했지만, 그건 전액 장학금이 아니라 수업료 면제 장학금이었다. 우등생에게는 졸업장에 “최우등 졸업” 또는 “우..

한 우물만 파기

1982년생인 나의 나이는 42세다.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높은 확률로 이미 삶을 마감했을 수도 있는 나이다. 내가 18살이던 즈음에 나는 부산의 한 서점에서 한스 라이헨바흐가 쓴 [시간과 공간의 철학]을 발견했다. 이 책을 발견한 후 읽어보니 재밌지만 어려웠고, 이 책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려 했다. 어떤 대학에 가는지는 크게 상관이 없었고, 그냥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결과를 토대로 내가 진학할 수 있는 대학에 가려 했다.    운이 좋아 서울대학교에 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말 운이 좋아서 서울대학교에 갔으며, 다른 대학교에 갔더라도 크게 상관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서울대학교에 가도 라이헨바..

역사와 그 교훈

이미 일어났던 일들을 돌아보는 작업을 역사라고도,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철학’이라는 것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의 ‘의미’를 따져 묻는 활동인데, 그 의미를 묻고 탐색하기 위해서는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곧 철학이냐? 그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철학적 성찰을 위해 역사적 내용이 주요한 참고가 되지만, 역사와 철학은 비교적 선명하게 구분되는 두 종류의 학술적 활동이다. 역사와 철학은 다르면서도 서로에게 핵심적이고 중요하다.    사람들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곧 정치를 하거나 경제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왜 필요할까? 내 생각에, 역사가들은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탐구..

사고는 늘 우리 곁에 있다

내가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고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내일 당장 불의의 사고로 나 또는 내 주변의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지난주 목요일 저녁에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전방 터널에서 사고가 나서 차량 정체가 시작된 후, 갑자기 앞에서 달려가던 차가 속도를 늦췄고 그에 따라 나도 속도를 늦추려고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마침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 정지하지 못하고 내 차의 뒤를 받은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크게 다치지 않았고 병원으로 이송되는 일 없이 곧장 가던 길을 갈 수 있었다. 충돌 직후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몸이 아프다는 것을 느낄 겨를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이후 계속 운전하다 보니 머리가 아팠고 허리에서도 뻐근함이 느껴졌다.    이번에 다..

일상 이야기 2024.05.16

모르는 게 약

너무 많이 알면 머리가 아플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참으로 모르는 게 약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의도적으로 주식 투자에 손을 대지 않는다. 사실 의지만 있다면 주식과 관련한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러한 정보를 수용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멍청한 머리로 주식 투자를 해서 이익을 낼 자신이 없고, 괜히 투자했다가 열에 아홉은 손해를 볼 것이 거의 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어떤 일을 잘 못한다면, 어설프게 그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못한다고 밝히고 안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크게 손해를 보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나에게는 일종의 도피처다. 책이나 논문을 펼치면 머리 아픈 일들에서 벗어나 나만의 생각 세계로 들..

일상 이야기 2024.05.12

통계물리학과 확률(1/3)

고대 그리스인 중 물, 불, 공기, 흙, 에테르 등과 같은 5가지 종류의 물질이 이 세계를 구성한다고 생각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분류가 매우 거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암석들이 있고 이들을 잘게 쪼개면 작은 알갱이들이 남는다. 작은 알갱이들은 물에 녹일 수 있으므로 액체가 될 수 있으며, 가연성 물질은 태우면 연기가 되어 대기 속으로 동화된다. 천상의 물체인 에테르는 몰라도,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 원소 사이에는 변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들은 실제로 원소라고 말할 수 없다. 이들보다 더 다양하고 기초적인 원소가 존재해, 이들이 결합하여 물, 불, 공기, 흙을 만들 것이다. 기체, 액체, 고체는 원소가 아니라 물질의 상태..

교수-되기

나는 아직 내가 교수라는 사실을 온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나와 같은 사람이 교수가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교수라는 사실은 너무나 우연히 혹은 운 좋게 일어난 일이다. 나는 세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지면서도, 이렇게 우연한 일이 일어나기에 이 세상은 살만한 게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사실 나는 매우 진지하고 성실한 유형의 사람이긴 하며, 사람의 유형만 보면 나는 철학 교수로서 매우 적합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근에 발급받은 공무원증(교육부)을 늘 소지하고 다닌다. 그리고 나의 공무원증을 볼 때마다 괜히 자랑스러운 마음이 든다. 내가 교육 공무원 교수가 되다니! 나의 공식적인 신분은 교수로 이미 확정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교수-되기’의 과정에 머물러 있..

일상 이야기 2024.05.05

상대성이론과 시공간(3/3)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우선 아인슈타인 자신의 관점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 뉴턴의 『프린키피아』(1687년)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다양한 전자기적 현상을 체계화한 전자기학이 발전하면서 질점이 아닌 ‘장(field)’이 물리학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전자기적 현상을 기술하는 물리 법칙인 맥스웰 방정식이 상대적으로 등속 운동하는 두 기준계에서 다른 꼴로 표현된다는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거듭 확인되었고, 아인슈타인의 1905년 특수 상대론은 ‘갈릴레이 변환’이 아닌 ‘로렌츠 변환’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바로 잡은 이론이었다. 비록 이후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1915년의 일반 상대론은 이와 같은 상대성 원리를 등속 운동이 아닌 가속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