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한다. 경험은 잘 잊히지 않는다. 그 사람은 지금껏 어떤 경험을 해왔는가. 그 사람은 삶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요 며칠 동안 나는 오래된 삶의 양식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런 결심이 가능했던 것은 나의 예전 경험 때문이었다. 손으로 공책에 글씨를 쓰던 경험. 내 방의 작은 책상에 앉아서 조용히 글을 읽고 생각했던 경험. 인터넷, 컴퓨터, 스마트폰을 멀리하기로 했다. 당연히 완전하게 일상으로부터 이탈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업무 시간에 나는 인터넷에 접속해서 온갖 활동을 한다. 그러나 업무 시간이 끝나면 외부로부터의 접속을 끊고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낸다.
공식적인 나의 일은 충실히 한다. 예를 들어 이번 학기에 나는 23학점 수업을 한다. 학생들보다 더 많은 학점의 수업을 진행하는 셈인데, 학생들에게는 필요한 일이다. 학술대회 참여하기, 번역하기, 논문 작성하기 등, 교수로서 내 할 일에 충실하게 임한다. 지난 1년 동안 교수로서 얼마나 열심히 활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점수가 교수 업적 평가 점수다. 다른 주관적인 평가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객관화된 지표가 그나마 공식적이고 공정하게 교수로서의 활동 실적을 보여준다. 그렇게 공식적인 내 업무에 최대한 충실하면서, 그 이외에 내게 남는 시간에는 복고적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 핵심에는 직접 손을 쓰고 몸을 쓰는 것이 있다.
좀 번거롭더라도 논문은 종이로 출력해서 읽고, 논문을 읽으면서 펜으로 직접 밑줄을 긋고 여백에 메모를 쓴다. 이제 교수가 되었으니 더 이상 책을 빌려서 읽을 필요는 없게 되었다. 필요한 책은 사서 읽으며, 연필이나 샤프를 이용해서 독서 중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한다. 나는 나의 손 글씨를 보는 게 좋다. 종이로 된 공책에 손으로 글씨를 쓰며 기록을 남기는 재미가 있다. 나는 수학 공식, 물리 공식, 영어 단어를 종이에 쓰며 외우는 일을 좋아한다. 글씨가 예쁘게 잘 써질 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쾌감이 있다. 나는 글씨를 멋들어지게 잘 쓰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글씨가 잘 써지지 않으면 무엇인가 불만족스럽다. 펜을 잡고 손으로 쓰는 글씨가 주는 아늑함이 있다.
세계적인 수준의 학술 활동을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분명 바람직한 지향이지만 현실적인 지향은 아니다.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지향이란, 나의 실력에 맞게 즐겁고 행복하게 학술 활동을 추구하는 것이다. 열심히 직접 책, 보고서, 논문을 읽고, 대학원 시절에 충분히 연습했던 것처럼 책상 위에 내가 읽은 문헌들을 여기저기 늘어놓고 한 땀씩 글을 조금씩 써간다. 비록 시간은 오래 걸리고 때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렇게 글을 한 편 완성하면 정말 내 것이라는 애착이 들고 뿌듯함이 느껴진다.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자판기로 대화하며 두드려 다듬듯이 글을 쓰면 퍽이나 편리하고 시간도 절약되겠지만, 내가 오래된 사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그렇게 글을 쓰면 그 글은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래된 방식으로 글을 써도 매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작업량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나는 오래된 방식을 고수하련다. 심지어 학술지에도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쓴 철학 논문을 투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경악스러움을 느낀다. 그 투고자는 그 글이 자신의 글이라고 느낄까? 어쩌면 그 사람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거듭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체(文體, style)를 잃어버린 것 아닐까? 나는 이런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내 과거의 경험으로 돌아가 전등 하나 켜 놓은 작은 책상에서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아무런 인터넷 접속 없이 글과 함께 생각에 잠기던 기억을 소환한다. 그렇게 나의 경험은 나를 구원한다.
나는 복고적인 삶으로 돌아간다. 견고한 책을 만지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힘을 꽉 주고 종이 위에 손으로 하나하나 글씨를 쓰며 작은 만족을 느끼는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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