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삶을 위한 철학

강형구 2023. 10. 31. 13:14

   나는 자주 이런 질문을 던진다. 대체 철학을 왜 하는가? 왜 우리는 나 혹은 나 이외의 존재 혹은 나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의미를 밝히려고 하는가? 왜 우리는 굳이 지식 혹은 기술이 아닌 ‘지혜(sophia)’를 얻으려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퍽 단순하다. ‘더 잘 살기 위해서’,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철학이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일까? 더 구체적으로 말해, 철학이 우리에게 먹을 것 혹은 입을 것을 주는가? 아니면 철학이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할 수 있는 재화를 제공해 주는가?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만약 철학이라는 과목이 고등학교의 필수 과목이라면 철학은 학생들의 학업 성취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겠지만, 대부분 철학은 선택 과목이며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많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을 위한 필수 과목으로 철학을 선택하는 학교는 별로 없다. 물론 몇몇 대학에서는 ‘비판적 사고’라는 이름으로 공통 필수 교양 강의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 과목을 전적으로 철학 과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하고 있는 기본적인 질서 혹은 제도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나는 철학이 ‘가장 기초가 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철학은 오로지 삶을 위한 기본적인 활동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농경시대에는 농업 활동이 철학의 바탕이 되고, 공업시대에는 공업 활동이 철학의 바탕이 된다. 과학기술의 시대, 정보통신의 시대, 인공지능의 시대, 빅데이터의 시대에는 당연히 이와 같은 우리 사회의 현실 혹은 실상이 철학의 바탕이 된다. 내 생각에 철학은 현실을 유지하는 기초적인 활동들보다 더 근본적이고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활동들을 더 잘하고 현명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과학철학은 과학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과학에 대해 좀 더 반성적이고 성찰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유도한다. 무엇이 과학을 과학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인지, 과학의 강력함과 더불어 과학의 한계는 무엇인지, 과학과 사회의 관계는 무엇인지, 과학적 실천에 있어서 정치와 윤리의 역할은 무엇인지 등등을 생각해 보게끔 만든다. 물론 이렇게 고민해 보고 다른 구성원들과 토론해 보는 일이 제도화된 과학적 실천을 하기 위한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활동은 과학적 실천과 그 실천을 하는 나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나에게 이 실천을 계속할 수 있는 ‘동기를 유발’한다.

 

   나는 나 자신이 철학이 사회 구성원에게 갖는 긍정적인 역할을 실증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박사과정을 휴학한 후, 나는 철학과 관련된 직업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내가 그때까지 전혀 공부하지 않았던 분야의 공부를 해서 직업을 얻었다. 나는 취업을 준비하며 법학, 경제학, 경영학 등 내가 학부 시절 수업을 단 한 번도 수강하지 않았던 과목들을 스스로 공부했다. 이렇듯 철학을 통해 배양된 사고 능력은 이 사회에서 실질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지식을 학습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철학은 다른 과목 혹은 분야를 공부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며, 내 삶에 목표와 의미를 부여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국 모든 철학은 삶을 위한 철학이다. 현생의 삶 너머의 삶을 이야기하는 철학마저도 실제로는 현실의 삶을 위한 철학이다. 철학은 오만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실제의, 현실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적인 활동들 그 자체가 철학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철학은 그러한 기초적인 활동을 늘 긍정하면서, 그 활동을 해나가는 인간들이 좀 더 현명하고 긍정적으로 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늘 겸손하며,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적 활동에 죽지 않고 따라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