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시간과 공간의 철학]을 읽고

강형구 2016. 11. 11. 00:11

 

   근래에 라이헨바흐가 쓰고 이정우 선생님이 번역한 [시간과 공간의 철학]을 다시 읽었다. 재미있었다. 이 책은 내 삶에 무척이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책을 몇 번째 읽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을 고등학교 시절 처음 만났을 것이다. 그 첫 만남의 장소가 부산의 서면에 있는 영광도서였는지, (지금은 없어진) 동보서적이었는지, 아니면 부전도서관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등학생이던 내게 이 책은 퍽이나 어려워서 나는 그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나는 이 책이 무엇인가 굉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내게 이 책은 외로운 섬 같았다. 역자인 이정우 선생님은 이 책 이후로 라이헨바흐의 책을 번역하지 않았고, 우리말로 번역된 상대성이론 해설서들 중에 이 책만큼 깊이 있는 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에서 영어로 쓰인 라이헨바흐의 이전 저작인 [상대성이론과 선험적 지식], [상대성이론의 공리화]를 찾았다. [공리화][시간과 공간의 철학]보다 더 전문적인 책이어서 도무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우선 [선험적 지식]에 대한 학부 논문을 쓰기로 하고 이 책을 번역했다. [공리화]는 학부 졸업 후에도 계속 읽었다. 비록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긴 했지만 말이다.

  

   책 한 권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시간과 공간의 철학] 중 상당 부분은 [공리화]를 전제하고 있고, 역자인 이정우 선생님도 그 사실을 자신의 번역서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래서 내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공리화]를 연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1986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된 [시간과 공간의 철학]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선험적 지식], [공리화] 모두 [시간과 공간의 철학]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들이다. 왜 아무도 이 책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나는 똑똑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무엇이 진짜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눈은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사실 나는 만약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 라이헨바흐를 연구한다면 훨씬 더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다. 그런데 아무도 연구를 하고 있지 않아서 그냥 내가 연구를 한 것이다. 그 뿐이다.

  

   [시간과 공간의 철학]1927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출판되었고, 이 때 라이헨바흐는 36세였다. 당시의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아인슈타인과 동료였고, 물리철학(자연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는 [시간과 공간의 철학]이라는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껏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전에는 눈치 채지 못했던 내용들을 읽을 수 있었으니, 아직도 이 책을 완벽하게 독파하지 못한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의 저술들이 아득하게 쌓여 있다. 기호논리학, 확률론, 양자역학의 철학, 자연법칙에 관한 논의, 시간의 방향에 관한 논의 등. 누군가가 연구를 좀 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 같은 우둔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 똑똑한 친구가 그의 저술들을 속속들이 이해해서 연구 결과를 출판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만약 요즘 회자되고 있는 최 모씨의 딸 정 모씨처럼 재정적으로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면 아무런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라이헨바흐를 연구했을 텐데 너무 아쉽다. 그리고 너무 안타깝다. 똑똑하고 젊은 친구들이 라이헨바흐를 제대로 연구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특히 철학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똑똑한 수학, 물리학 전공자들이 라이헨바흐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 아인슈타인에게 푸앵카레와 마흐가 있었다면, 미래의 아인슈타인에게 적합한 철학자는 다름 아닌 라이헨바흐일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