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클라(Sklar),『물리학의 철학(Philosophy of Physics)』, 109-147쪽.
열역학에서 통계역학으로
열역학: 온도와 열량이 서로 구분되는 개념들이라는 인식은 비교적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뒤이어 열이 일종의 물질이며(칼로릭, 열소) 온도란 물질에 있는 열소의 농도에 대한 측도라는 견해가 등장했는데, 이는 열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학적 견해와는 다른 종류의 견해였다.
카르노는 열의 총량이 역학적 일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을 관찰하고, 클라우지우스는 이러한 관찰을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열역학 법칙들이 밝혀졌다. 열과 일이 상호변환 가능하더라도 열과 일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열역학 제 1법칙이다. 일반적 비가역성의 원리가 바로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용가능한 열의 양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열에 대한 운동학적 이론: 과연 열역학은 그 자체로 자율적인 학문인가? 물리학자들은 열역학적 현상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설명을 요구하게 되었다. 대체 열이란 무엇이길래 역학적 에너지로 변환 가능한 것인가? 프랜시스 베이컨, 존 베르누이 등은 열이 작은 입자들의 운동에너지의 일종이라고 추측했고, 이러한 추측은 19세기에 이르러 지배적인 견해가 된다. 많은 학자들은 기체 상태에 있어서 이러한 추측이 가장 단순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 클럭 맥스웰은 평형 상태에 있는 기체 분자들의 속도 분포가 같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고 주장했고, 루드비히 볼츠만은 비평형상태에서 평형상태로 어떻게 입자의 운동 분포가 진화할지 예측하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볼츠만은 속도분포함수의 진화에 대한 방정식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뿌엥까레에 의하면, 계의 초기의 동역학적 상태가 주어졌을 경우 무한한 시간 동안 이 초기의 상태로 무한히 많이 되돌아오게 되는데(뿌엥까레의 ‘회귀’), 그렇다면 볼츠만은 계가 비평형상태에서 평형상태로 변환된 이후 평형상태에 계속 머무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고전동역학에 따르면 계는 시간 역방향으로의 변환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볼츠만의 결론은 고전동역학에 위배되는 것 아닌가?
이 지점에서 확률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평형상태에 가까운 조합은 막대한 양의 조합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 즉, 평형상태를 압도적인 다수의 확률을 갖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때 편차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평형상태에서 멀어질수록 이러한 편차가 일어날 확률은 줄어든다. 가장 확률이 높은 상태들에 대한 집중 곡선을 그리면 그 곡선의 움직임은 볼츠만 방정식을 따르게 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세계에서는 평형상태보다는 비평형상태가 더 많은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볼츠만의 답은 다음과 같다. 큰 체계 속의 작은 부분은 짧은 시간 동안 평형상태로부터 멀어져 있을 수 있다. 또한, 관찰을 할 수 있는 유기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에너지의 흐름이 있어야만 한다.
통계역학에 대한 에르고딕 접근: 일정한 부피를 가진 기체에 내부 에너지가 주어졌고, 미립자들 각각은 서로 다른 상태를 갖고 있다고 하자. 이 때 주어진 영역에서의 미시계의 총 개수는 일정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거시적으로 관찰가능한 물리량을 계의 미시상태들의 함수의 평균과 연결시킬 수 있다. 실제로 깁스는 이러한 평형값 계산법을 형식화시키고 일반화시켰다. 이후 깁스가 도출한 결과는 볼츠만이 도출한 결과와 동일함이 밝혀졌다.
하지만 우리는 입자들이 볼츠만이 기술한 대로 움직이는지의 여부도 모르고, 만약 그렇게 움직인다면 왜 그렇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모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시된 것이 바로 에르고딕 가설이다. ‘어떤 개별적 계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미시적 동역학적 상태가 그 계에 부여된 제한들과 양립가능한 모든 가능한 미시적 동역학적 상태들을 경험할 것’이라는 것이 바로 ‘에르고딕 가설’이다. 그리고 이러한 ‘에르고딕 가설’으로부터 여러 다양하고 중요한 귀결들이 도출됨을 보일 수 있다. 문제는 볼츠만이 이 가설의 참됨 여부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비평형상태에 주어진 모든 가능한 체계들의 집합의 진화는 볼츠만 방정식을 따른다면, 과연 왜 따르는 것인가?
주어진 속도를 가진 분자들의 충돌 빈도는 그 속도를 가진 분자들이 기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에 비례할 것이라는 것이 볼츠만의 가설이었다. 또한 ‘분자적 무질서의 공준’이 중요하다. 이 공준에 따르면 분자들의 충돌은 매번 무질서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공준이, 분자들의 운동은 초기 상태와 동역학 법칙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기존의 고전동역학적 관점과 양립가능한 것인가? 열역학에서 보여지는 시간비대칭성과 동역학 법칙들의 시간 대칭성은 과연 양립가능한 것일까?
비가역성의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들: 열역학의 토대가 되는 통계적 이론을 그 기초가 되는 동역학적 이론과 조화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만약 통계역학의 확률적 가정들이 동역학 이론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가정들이 왜 참인지에 대한 물리적인 근거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평형을 특성화하기: 우리는 계의 미시상태에 대한 특화된 함수들의 평균값과 관찰가능한 평형값의 양을 동일하게 두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이는 에르고딕 가설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방법이며, 에르고딕 가설 자체의 신빙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계가 특정한 구체화된 제약 조건들을 만족시킬 경우, 표준적 측정을 이용해서 계산된 상평균의 값이 그 양들의 시간 평균값과 일치한다는 정리를 도출할 수 있다. 즉, 시간의 비율이 확률의 비율과 같다는 것이다. 이 정리는 에르고딕 가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과와 거의 동일한 결과를 제공해준다. 위에서 언급된 제약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계를 찾을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불안정해서 빠른 속도로 진화해하는 계가 그러한 계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 정리는 표준 확률 측정에 있어 초기 확률이 0인 집합을 배제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제의 합당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또한 이 정리는 좀 더 실제적인 계들에 잘 부합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Kolmogorov-Arnold-Moser 정리’에 따르면, 외부에서 일정 정도의 교란이 가해지더라도 특정하게 닫힌 궤도와 영역 속에서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까닭에 표준 측정에 의한 측정값이 0이 되는 영역이 존재하고, 이러한 KAM 정리가 적용되는 계들을 실제 계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KAM 정리는 에르고딕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에르고딕 조건보다 더 온건한 조건을 찾아야 할 필요성에 당면하게 된다.
평형에로의 접근: 평형이론에 확률적 요소를 도입해야 할 이유는 분명해보인다. 기존의 동역학적 법칙들만으로는 평형상태에 도달함을 보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선 다음과 같은 물음을 생각해보자. 계의 초기 확률분포가 매끄러운 방식으로 확산되어 나갈 것인가? 우리는 좁고 밀집된 영역에서 넓고 성글게 퍼진 영역으로 확률분포가 확산되는 것을 보일 수 있지만, 성글게 퍼져나가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 계가 평형상태에 도달함을 보이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분자적 혼돈의 공준’을 부여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하지만 우리는 왜 끊임없이 재무작위화의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이는 그 기초에 있는 동역학적 법칙들과 합치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에 대한 비표준적인 접근법들: 설명하고자 하는 계가 고립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열역학의 시간 비대칭성을 확률 가정을 도입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표준적인 견해라면, 비표준적 견해에서는 계의 완전한 고립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상태의 역행이 진정으로 일어나게끔 충분히 계를 고립시킬 수 있다. 또한 많은 물리학자들은 계가 외부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서도 열역학 제 2법칙이 말하는 시간 비대칭성이 나타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동역학 법칙들의 시간 가역성이 그른 것일까?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귀납적 추론의 일반 원리(무차별의 원리)를 탐구함으로써 통계역학에서의 확률의 적용을 합리화시키려고 시도한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 원리는 문제가 되는 계를 특성화시키는 명확한 방법이 제시되지 않는 한 공허할 따름이다. 또한 왜 거시적 특성들이 법칙적 행동을 보여주는지, 왜 평형으로의 접근이 미래의 방향을 나타내는지에 대해서 귀납적 접근법은 적절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문제에 대한 표준적 접근법들: 주어진 초기 확률 분포 및 몇몇 전제되는 법칙들을 통해 (계에 특정한 제한 조건들이 가해졌을 경우의) 평형확률분포를 도출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특정 종류(국소적이고 일시적인 평형)의 상태에 대한 초기 확률 분포는 무차별의 원리에 입각해서 부여될 수 있다. 또한 몇몇 경우에 있어서는 분자적 혼돈 공준을 사용하지 않가서도 초기 확률이 평형분포로 접근함을 보일 수 있다. 물론 에르고딕적 성질 그 자체 만으로는 계 전체가 평형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힘들다.
‘뒤섞임’ 조건을 도입하면, 무한대의 시간이 주어졌을 경우 비병리적인 초기확률분포가 평형확률분포에 도달함을 보일 수 있다. 만약 계가 하부 집합에 일정한 확률값을 부여할 수 없고, 그러한 의미에서 특정 종류의 확률적 미결정성을 갖고 있다면(이를 ‘K-계’라 부른다), 이 계는 평형확률분포에 도달한다. 또한 계의 사전 정보를 다 알고 있어도 그 계의 하부집합들이 앞으로 어디에 소속될지에 대한 확률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이러한 계를 ‘베르누이 계’라 부른다) 이 계 또한 평형확률분포에 도달한다.
하지만 왜 우리는 확률 측정치가 0인 병리적 집합을 무시해야 하는가? 이 또한 그 자체로 일종의 확률적 가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실제계들은 (앞서 KAM 정리에 의해) ‘뒤섞임’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무한한 시간이 아닌 유한한 시간 이후에 벌어질 수 있는 일에 말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모형화하고자 하는 것은 짧은 시간 동안에 비평형에서 평형에 이르는 과정이다.
‘뒤섞임’의 가정 그 자체가 시간 비대칭성을 전제하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시간 비대칭성이 왜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다. 이상까지 제시된 문제들은 열역학적 행동을 미시동역학적 행동과 확률을 사용해서 어떻게 이상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완전한 동의가 부재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초기확률분포의 문제: 평형으로 향하는 단기적이고 균일하며 성근 접근을 얻기 위해서는 적합한 초기확률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너무 작지 않고 정칙적인 모양을 가진 미소 상태 영역에 확률이 균일하게 분포해야 한다. 하지만 왜 이런 방식으로 확률이 분포되어야 하는가? 계가 적절한 크기와 규칙성(정칙성)을 갖고 있어야 초기 조건에 민감해져서 계의 미시적 진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 크릴로프의 해답이다.
우주론과 비가역성: 과연 시간 비대칭성의 물리적 근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우주론적 관점에서의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우주 전체는 열역학 제 2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우주의 팽창 혹은 수축과는 관련이 없다. 라이헨바흐의 경우, 비평형상태의 분지계(branch system)들이 무한한 시간 동안 평형상태로 수렴해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왜 엔트로피가 증가해나가는지에 대한 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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