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물리학의 철학 독서노트 09

강형구 2016. 9. 19. 06:55

 

스클라(Sklar),물리학의 철학(Philosophy of Physics), 147-155.

  

시간의 방향이라는 문제

  

   엔트로피의 비대칭성(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이 시간 그 자체의 비대칭성(과거와 미래는 구분된다)을 표상하는 것일까 아니면 엔트로피의 비대칭성과 시간의 비대칭성은 별개의 문제인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엔트로피의 비대칭성이 곧 시간의 비대칭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엔트로피의 비대칭성을 근거로 시간의 비대칭성을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엔트로피의 흐름이 곧 시간의 방향을 의미한다고 가정한다면, 우주 전 영역 중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우주의 영역이 있을 경우, 그 영역에서의 시간의 흐름은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과 반대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클라에 따르면, 볼츠만의 테제(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과 엔트로피의 증가가 대응된다)는 시간의 방향이 엔트로피의 방향으로 환원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볼츠만의 테제에 의하면, 국소적 엔트로피 비대칭성이 없을 경우 시간의 두 반대 방향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어도 과거와 미래의 구분 또한 비대칭성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자연에는 왼쪽과 오른쪽 사이에 법칙적 비대칭성이 존재한다(아원자적 현상에서 우기성 법칙이 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 중력법칙과 아래/구분은 다르다. 만약 중력이 사라질 경우 아래/위 구분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아래 방향과 관련된 모든 사실들이 중력에 의해서 설명되기 때문이다. , 중력법칙 및 아래/구분은 왼쪽과 오른쪽 사이의 법칙적 비대칭성 및 왼쪽과 오른쪽 사이의 구분과는 그 성격상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과연 엔트로피의 증가시간의 비대칭성사이에 있는 관계는 위의 사례들이 보여주는 두 관계들 중 어떤 관계일까? , 과거와 미래를 결정하는 기초적인 경험들의 모든 특징들이 엔트로피의 비대칭성으로부터 설명될까 그렇지 않을까? 만약 설명된다면 둘 사이의 관계는 중력법칙 및 아래/구분과 유사할 것이고, 만약 설명되지 않는다면 둘 사이의 관계는 왼쪽/오른쪽구분과 유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대표적인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보자.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과거에는 기록이 있지만 미래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라이헨바흐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만약 어떤 계가 거시적으로 낮은 엔트로피를 갖고 있다면, 이 계는 반드시 외부의 계와 특정한 상호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을 일종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모래해변 위에 찍힌 발자국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에는 난점이 있다고 스클라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레이더 스크린에서의 신호의 경우, 우리는 이러한 신호를 근거로 과거가 아닌 미래를 추론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현재의 상태로부터 미래가 아닌 과거를 추론할 수 있게 해주는 전형적인 거시적 엔트로피 상태가 있을 수 있다고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응은 그러한 전형적인 특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답변하기 힘들고, 왜 그것이 그러한 전형적인 특성인지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다음으로 과거와 미래의 비대칭성을 인과적 비대칭성을 근거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살펴보자. 데이빗 루이스의 경우 인과를 반사실적 조건문과 연관해서 설명하려고 했다. 이 때 반사실적 조건문의 진위는 어떻게 결정하는가? 반사실적 조건문에서는 현실세계는 아니지만 좁은 범위의 변동을 제외하고는 현실세계와 매우 유사한 가상세계를 상정하고, 그 세계에서 우리가 가정한 조건을 구현했을 경우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를 예측한다.

  

   반사실적 조건문을 사용했을 경우 과거와 미래는 어느 정도 구분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하나의 주어진 사건은 미래에 대해서는 과잉결정되는 것으로(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미래의 가능세계가 복수라는 의미에서) 보이는 반면, 그 사건이 과거에 대해서도 과잉결정되지는 않는 것으로(해당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과거의 가능세계가 매우 제한되기 때문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보자. 인과적 비대칭성에 관련된 기초적인 개념들은 거시적인 엔트로피의 증가로부터 설명되는가? 거시적인 엔트로피의 증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우리가 물리적 사건의 개념을 어떻게 특성화하는지에 대해 상당부분 의존하기 때문에, 이 물음에 대해 확실하게 그렇다고 결론내리기는 힘들 듯 하다. 또한 인과적 비대칭성을 열역학에서의 미시적인 엔트로피 증가와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가도 여전히 완벽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극한적인 경우를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가 시간적 비대칭성에 대해서 경험하는 모든 요소들이 엔트로피의 비대칭성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면 즉 볼츠만의 프로그램이 충분히 진행되고 나면,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엔트로피 증가에 의해 생성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극한적인 경우에도 시간 비대칭성이 엔트로피 비대칭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심리적인 과정과 물리적인 과정을 동일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심리철학의 맥락에서). 이들에 의하면, 우리의 심적 과정이 두뇌의 물리적인 과정에 수반할 수는 있을지라도 이 두 과정이 서로 같다고 볼 수 없다. 에딩턴에 의하면, 물리적 대상이 인간에게 지각될 때에는 지각 과정에 인간 고유의 지각적 특성이 반영되기 때문에 물리적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심리적 지각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것에서 심적인 것을 분리시킬 수 있고, 그런 까닭에 둘 사이의 구분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시간성은 예외다. 에딩턴에 의하면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모두에서 시간성은 동일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시간성과 심적인 시간성을 명확하게 분리시킬 수 없고, 그 결과로 심적인 것과 엄격하게 분리된 물리적 시간성을 말할 수가 없다. 따라서 에딩턴 또한 우리가 지각하는 심리적인 시간성으로부터 물리적인 시간성을 추론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논평: 우리는 편의상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하지만, 나는 이렇게 구분되는 직관적인 시간이 세계에 일종의 실체로서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갖는 직관적인 시간 개념은 인간이라는 생물체 특유의 것이며, 인간 종이 하나도 남겨지지 않게 될 경우에는 이러한 시간 개념이 더 이상 세계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 세계에서 벌어지는 물리적인 현상들을 살펴보면 그것들에는 일종의 방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특정하게 정의한 물리적 개념인 엔트로피의 개념을 토대로 다양한 물리적 현상들에서 볼 수 있는 방향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즉, 나의 입장은 시간에 대한 인간의 직관이 관련된 물리적 현상에 대한 물리학적 탐구를 시작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일단 물리학적 탐구가 진행되고 나면 더 이상 우리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신뢰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그것에 어떤 존재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인간의 직관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시간에 관련된 가장 성공적인 과학적 이론이 인간의 시간 직관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직관에 기반해서 시간이라는 독립된 존재가 세계에 있다고 상정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