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르카나티, [문자 그대로의 의미] 요약 정리 01

강형구 2016. 6. 27. 06:37

 

 

르카나티(Recanati), 문자 그대로의 의미01~02

 

   한 문장이 발화되었을 때 그것을 문장의 의미’, ‘말해진 것’, ‘함축된 것이라는 세 요소로 나눌 수 있다. 이 때 문장의 의미는 규약적이고 맥락독립적이며, 말해진 것과 함축된 것은 맥락의존적이고 명제적이다. 최소주의자들은 문장의 의미와 말해진 것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범주에 포함시키며 이를 화자의 의미와 대비시킨다. 최소주의자들은 문장의 명제적 의미가 맥락의존적인 요소에 의해 채워져야(saturate) 할 경우에만 어쩔 수 없이 화자의 의미요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너는 죽지 않을거야”, “존에게는 아이들 셋이 있어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문자 그대로의 명제적 의미와 실제에서의 의사 소통에 쓰이는 명제적 의미는 서로 구분된다. 더 중요한 사실은 후자의 의미는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optional) 과정을 통해 충족되는 것(enrichment)’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만일 한 명제의 문자 그대로의 진리 조건과 직관적 진리 조건이 서로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만약 최소주의의 입장에서 직관적 의미는 말해진 것의 외부적 요소인 대화적 함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면, 최소주의자들은 함축이 무의식적인 과정에서 일어남을 보여야 한다. 그라이스의 함축 이론에서 일반 함축은 개별 함축과는 달리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생성되고 해석되므로 최소주의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함축은 무의식적 차원이 아닌 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까닭에 접근 가능하며(available), 이는 개별화되고 특정한 맥락이 요구되는 그라이스의 개별 함축과도 합치한다. 따라서 말해진 것에 대한 다른 방식의 해명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말을 들었을 경우, 우리의 언어적 이해 능력의 근저에 있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의식적인 결과물이 생성되고 그것이 말해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말해졌는지와 화자가 그것을 말했음을 동시에 안다. 문장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의 옳고 그름을 평가할 수 있는 기초적인 표상을 얻었을 경우, 그 표상이 말해진 것에 대응한다. 맥락의존적인 채움의 과정은 개인의 잠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차적인 화용적 과정이다. 반면 말해진 것에 대한 일상적인 추론 과정은 개인의 의식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이차적인 화용적 과정이다. 이 때 우리는 청자에게 무엇이 말해졌으며 무엇이 함축되는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음(정상적 해석자normal interpreter)을 전제하며, 따라서 우리는 말해진 것을 결정하기 위해서 정상적 해석자가 제시하는 해석을 확인해야 한다. 이상을 접근 가능성방식이라고 하자.

 

  

   말해진 것은 언어적 규칙의 지배에 있는 문장의 성질이어야 하며, 채워짐이란 언어적으로 조절되는 화용적 과정이라는 것이 최소주의의 입장이다. 이에 반해 접근 가능성방식에서는 (채워짐과 대비되는) 자율적 충족이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화용적으로 조절되는 화용적 과정으로 본다. 이에 대해 발화의 객관적 내용은 화용적인 힘(진지한 주장 혹은 반어적인 발화 등)과는 무관해야 한다고 반대할 수 있지만 이는 말하다라는 동사를 말하려고 하는 것까지 포함하도록 더 넓은 의미로 정의하면 해결 가능하다. 말해진 것은 문장의 객관적 성질이라고 주장하며 말해진 것의 화용적 접근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해진 것은 '말해진 것에 대한 이해'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다.

 

  

   최소주의에서는 명제적 내용을 채우기 위한 것 이외의 요소는 외부적이고 부가적인 요소로 취급한다. 그러나 접근 가능성조건은 최소주의에서 외부적이고 부수적인 요소로 취급하는 것이 말해진 것자체를 구성하는(constitutive) 요소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요소들을 제거할 경우 발화에 대한 직관적 의미가 더 이상 대화 참여자들에게 접근 가능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접근 가능성방식에 의하면 진리-조건적 해석 또한 넓은 의미에서 화용적인 것이 된다. 채우는 것 이외의 자율적 선택 과정 또한 일차적인 화용적 과정에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무엇이 말해졌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맥락적 요소들을 개입시킨 상태에서의 추론을 통해 입력값(input)을 해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일차적인 화용적 과정들은 명제 이전에 이루어진다. 대화자들은 일차적인 과정의 산물만을 의식할 수 있다. ‘채워짐은 일차적인 과정에 속한다. 언어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채워짐 이외의 일차적인 화용적 과정들은 선택적이며 맥락에 의해 좌우된다. 자율적 충족을 통해서 발화의 직관적 진리조건이 영향을 받는데, 이 때 자율적 충족은 어쩔 수 없는 언어적인 과정이 아니다. 표명되지 않은 문장 성분들에 대한 이해가 대부분의 경우 특화(specifization)와 관계되더라도, 특화가 충족과 등치될 수는 없다. 충족의 역은 이완(loosening)이며 이는 적용의 조건을 완화시킴으로써 임시방편적인 개념을 구축한다. 이에 덧붙여 의미론적 전이(semantic transfer) 또한 일차적인 과정에 속한다. 일차적인 과정이 이와 같은 세 가지 범주로 충분한지, 유사-구문적 과정인 확장(expansion)' 개념을 통해 위의 세 가지 범주가 통합될 수 없는지의 문제는 이후에 논의하기로 하자.

 

   그라이스(Grice)에 따르면 명료화(disambiguation)와 채워짐(saturation) 만으로 말해진 것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에 의하면 발화된 명제의 조합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이후에 화자의 의미에 대한 추론이 뒤따른다. 그러나 일차적인 화용적 과정에는 채움 뿐만 아니라 자율적 충족, 이완, 의미론적 전이 등 선택적 과정이 포함된다. 이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도출된 의미이며,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도출된 의미의 등장 이전에 반드시 조합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론적 값이 도출된 다음 추가적인 의미가 분석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 발화의 해석에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도출된 의미가 평행적으로 작용한다. 비록 도출된 의미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부터 끌어내어진다고 하더라도 두 의미는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 있게 된다. 따라서 결국에는 도출된 의미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억압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토끼라는 단어 그 자체가 어떤 표상을 일으킨다고 해도, 그와 동시에 관계되는 다른 표상들도 활성화되고(activated) 그 맥락에 가장 적합한 표상이 더 강하게 활성화되며 이는 결국 가장 접근 가능한 것이 된다.

  

   다양한 종류의 일차적인 화용적 과정은 맹목적이며 기계적이고 해석자의 반성(reflection)을 반영하지 않는 과정이며, 이 과정의 산물로 해석이 발현한다. 첫 번째 등장하는 해석이 불충분할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화용적 과정이 되풀이 될 수 있음을 근거로 일차적 과정의 맹목성을 비판할 수 있지만, 이는 화용적 과정이 의식적임을 말해준다기보다는 해석이 등장하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 접근 가능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비롯되는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환유적 의미의 경우에는 그 의미가 반드시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조합된 이후에 생성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에 술어가 등장함과 동시에환유적 해석이 문자 그대로의 해석과 경쟁하고, 이후 환유적 해석이 더 접근 가능해지기 때문에 환유적 해석이 채택되는 것이다.

 

   문장의 해석에 대한 일차적인 화용적 과정에서는 문장 구성 성분 각각에 대한 일차적 과정이 서로 상호작용한다. 문장 구성의 성분이 어떤 비-문자적 의미를 갖는가에 따라 문장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고(‘도시는 잠이 들었다에서 도시잠이 들었다의 의미), 둘 이상의 의미 중 어떤 의미를 가져도 발화 전체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나는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에서의 피아노 소리’)가 있다. 따라서 문장을 구성하는 두 성분 중 하나인

,

라는 해석이 있고 다른 하나인

,

라는 해석이 있을 경우, 좀 더 정합적인 해석에 대한 선호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해명해야 한다. 이를 해명하기 전에 우선 도식(schema)' 개념을 살펴보기로 하자.

 

   “존이 어제 경찰관에게 붙잡혀 갔다. 그는 막 지갑을 훔친 상태였다.” 이 문장의 경우 청자의 도식은 술어 붙잡혀 갔다훔친 상태였다를 통해 활성화된다. 활성화된 도식은 그 도식에 부합하는 문장의 다른 구성 성분들이 갖는 의미론적 값들에로의 접근 가능성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도식을 활성화시키는 정합적인 해석이 기타 해석들에 비해 더 선호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이러한 도식의 역할은, 발화에 대한 해석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top-down) 광범위한 과정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