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카나티(Recanati), 『문자 그대로의 의미』중 7장
표현 유형의 언어적 특성에 의해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맥락의 특수한 측면들 때문에 요구되는 구성 성분들이 있다. 이 때의 요구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타동사의 목적어가 구문론적으로 실현되지 않았을 경우를 두 경우로 나눌 수 있는데, 비한정적으로 사례를 제시하지 않았을 경우(INI)는 선택적 과정에 의해서 명제가 구성되는 반면, 한정적으로 사례를 제시하지 않았을 경우에는(DNI) 어쩔 수 없는 과정에 의해서 명제가 구성된다. 즉, INI에 속하는 동사는 선택적 화용 과정인 풍부화를 통해서 맥락적 성분을 제공하고, DNI에 속하는 동사는 어쩔 수 없는 화용 과정인 포화를 통해서 맥락적 성분을 제공한다.
하지만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기준이 아니라, ‘선택성’과 ‘어쩔 수 없음’을 구분하는 보편적인 기준은 없을까? 이에 르카나티는 선택성 기준을 제시하는데, 이는 내용의 맥락적 구성 성분이 선택적 다양성의 화용적 과정을 통해 제시될 경우, 그러한 성분이 제시되지 않더라도 발화가 완전한 명제를 이루는 가능한 맥락을 항상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준의 문제점은 이 기준을 적용했을 때에도 ‘선택성’과 ‘어쩔 수 없음’을 구분하기 힘든 사례들이 있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양화사가 포함된 문장 “대부분의 학생들은 남자이다”의 경우, 이 문장을 “(이 교실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남자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남자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첫 번째 해석의 경우는 ‘선택성’이 적용되고 두 번째 해석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음’이 적용되지만, 선택성 기준 만으로는 두 가지 해석 중 무엇이 옳은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다.
이에 지표주의자들이 내놓은 다른 기준이 바로 결속 기준이다. 결속 기준에 의하면 포화의 결과로 맥락적 요소가 제시되는 경우, 논리적 형식의 측면에서 문장 내에 (유사) 자유 변수가 존재하며 그것에 부여되는 값이 맥락에 따라 변화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맥락적 요소가 문장 S와 결속된 특정 연산자에 주어진 값들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경우, 그 요소는 (선택적 과정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과정인) 포화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다. 이와 같은 결속 기준을 적용하면 양화사가 포함된 문장을 ‘포화’가 적용된 것으로 판가름할 수 있고, 이는 선택성 기준이 해결하지 못한 난점을 극복한 셈이 된다.
문제는 선택성 기준과 결속 기준이 서로 다른 결과를 산출하는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온다”라는 문장의 경우 맥락주의자들은 선택적 과정에 의해서 맥락적 요소가 제시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 지표주의자들은 이 문장을 “내가 가는 데마다 비가 내린다”라는 문장과 등치시키고 이렇게 등치된 문장은 포화에 의해서 맥락적 요소가 제시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지표주의자들은 맥락 의존적인 모든 진리 조건은 자연 언어의 실제 구조에서 맥락에 민감한 요소들의 값을 고정시킴으로써 산출된다고 주장한다. 즉 지표주의자들은 결속 기준을 근거로 진리조건적 내용에 있어 선택적 요소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러한 지표주의의 불합리함을 직접적으로 논증하기 위해서 르카나티는 변형 함수(variadic function)의 개념을 도입한다. 변형 함수란 특정 종류의 함수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변형 인자이며, 이 함수는 하나의 관계가 입력값으로 투입되면 이 관계와는 다른 종류의 관계를 산출값으로 배출한다. 변형 함수 중에는 부가적 변형 함수가 있고(존은 먹는다 → 존은 파리Paris에서 먹는다) 축소적 변형 함수가 있다(존이 메리에게 말했다 → 존은 말했다). 이 때 부가적 변형 함수의 경우에는 조건 작용자가 추가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제시된 부가적 변형 함수의 경우,
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지표주의자들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1) “비가 온다”라는 문장을 분석한다고 하자. (2) “내가 가는 데마다 비가 온다”라는 문장에서 비가 오는 장소는 양화사 ‘내가 가는 데마다’에 의해서 그 값이 정해진다. (3) 결속 변수가 없을 경우 결속은 일어나지 않는다. (4) “비가 온다”는 비가 오는 장소라는 변수를 포함한다. (5) 따라서 이 경우에도 논리적인 형식의 측면에서 맥락적인 값이 자유 변수에 포화를 통해 할당되는 것이다. 르카나티에 의하면 단계 (4)에 치명적인 애매성이 존재한다. 지표주의자들은 위의 논증에서, ‘내가 가는 데마다’라는 양화사가 작용하는 “내가 가는 데마다 비가 온다”라는 문장이 “비가 온다”라는 바로 그 문장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제는 받아들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변형 함수 분석에 따르면 ‘내가 가는 데마다’라는 변형 함수는 변수들을 결속시킬 뿌난 아니라 ‘장소’라는 추가적인 논항을 덧붙이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가는 모든 장소 l에 대해)(l에서(비가 온다))라는 문장은 (비가 온다)라는 문장과 대응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표주의자들의 논변은 오류(잘못된 전제)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거짓이다. 물론 영역 제한 양화사가 포화의 한 경우일 수도 있지만, 지표주의자들이 이를 증명하지 못한 상황이므로 그들의 논변이 거짓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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