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토머스 쿤에 대한 단상

강형구 2016. 4. 29. 17:11

 

   나는 미국의 과학사가이자 과학철학자였던 토머스 쿤(Thomas Kuhn, 1922-1996)에 대한 양면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나는 학부시절 조인래 교수님의 과학철학 수업을 계기로 그의 책 [과학혁명의 구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2002년 또는 2003). [구조]는 매우 매력적인 책이었지만,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그의 책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과학과 관련한 너무 크고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너무 허술한 방식으로 주장하고 있었고, 나는 그의 주장이 역사적인 주장인지 철학적인 주장인지를 잘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구조]를 읽으면서 그의 책이 위험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한 책이 과학철학에서 그렇게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후 나는 대학원에 들어가서 그의 과학사 저술들을 읽었다(2009). 그의 [코페르니쿠스 혁명] 중 일부분을 읽었고, 그가 썼던 다른 논문들도 읽었다. 나는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쿤은 뛰어난 문장가였고, 그의 문장들은 매혹적이었다. 섬세한 이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그러한 문장을 생산해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에게 쿤은 위험한 사상가였다. 쿤은 문학 저술가와 비견될 만큼 아름다운 문장력을 갖고 있었기에, 그가 자신의 거칠고 대담한 사상을 아름답고 매혹적인 문장 아래에 포장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과학혁명에 대한 그의 주장은 대담했지만 치밀하지 않았다. 그것은 과학의 거시적인 역사에 대한 주장이었지만, 쿤 자신은 그것이 과학에 대한 철학적 주장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내게 그의 주장은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물론 나는 토머스 쿤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다. 그렇지만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토머스 쿤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고, 그의 철학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에 대한 나의 입장을 간략하고 엉성하게나마 표현해보고자 한다. 나의 이런 결정에는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2009년에 나는 이 책의 일부분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고, 이를 계기로 과학사가로서의 쿤의 역량을 매우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이 책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다. 나는 때때로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를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보곤 한다. 나는 [구조]가 과학사회학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기여했을지 모르나, 과학사나 과학철학을 위해서는 그다지 이롭지 않은 책이었다고 평가한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저술한 이후, 쿤이 [구조] 대신에 갈릴레오나 뉴턴의 역학에 대한 책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그가 18~19세기 물리학에 대해서, 그리고 20세기 물리학에 대해서 상세하게 연구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쿤은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과학혁명에 대해서 상세히 들여다보는 과학사적 연구를 하지는 않았다. 비록 코페르니쿠스가 과학혁명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물리학의 역사에서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뉴턴의 물리학 혁명이었다. 그가 보어나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가 아닌 플랑크를 중심으로 양자역학의 초기 역사를 서술한 것도 그렇다. 그는 [혁명]의 시발점이 된, 다소 보수적이었던 과학자에 대해서 썼다. 정작 과학혁명의 진두를 지휘했던 과학자들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만약 쿤이 물리학의 역사를 꼼꼼하게 분석했다면 그가 [구조]와 같은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조]에는 쿤의 야심, 특히 그가 철학자로서 가졌던 거대한 야심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야심은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상황에서 어설픈 방식으로 드러났다. 비록 [구조]의 문장이 이러한 미성숙함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후 쿤은 자신이 낳은 아이였던 과학혁명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혔다. 이후 그 아이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 영향력은 쿤 자신이 예측하거나 원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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