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헴펠-오펜하임, [설명의 논리에 대한 연구] 요약 정리

강형구 2015. 10. 29. 22:36

 

. 내용 요약

 

1. 도입

 

   과학적 탐구는 단순히 현상을 서술하는 차원을 넘어 탐구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한다. 그런데 과학적 설명의 본질적인 특성(essential characteristic)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기능(function)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본 논문에서는 과학적 설명의 기본적인 패턴에 대해 살피고, 설명적 논증(Explanatory argument)의 논리적 구조와 법칙(law)의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논쟁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볼 것이다.

 

1: 과학적 설명에 대한 기본적 개괄(survey)

 

2. 몇몇 사례들(illustrations)

 

   뜨거운 물에 급히 담근 수은 온도계의 수치가 올라가는 현상, 노 젓는 배에서 물에 담긴 노(oar)의 일부가 수면 윗부분과 비교할 때 휘어 보이는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모두 다음과 같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그 현상이 일어나기 위한 사전 조건(antecedent condition). 둘째, 특정한 보편 법칙(general law). 우리는 해당되는 보편 법칙에 대해서도 왜 그러한 법칙이 성립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그에 대해서는 그 법칙보다도 좀 더 일반적인 법칙과 규칙성을 통해 답변할 수 있다.

 

3. 과학적 설명의 기본적 패턴

 

   과학적 설명은 설명항(explanans)피설명항(explanandum)으로 구분할 수 있다. 피설명항이란 설명되어야 할 현상을 서술하는 문장(현상 그 자체가 아닌)이다. 설명항이란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된(adduced) 문장들의 집합(class)이다. 설명항은 사전 조건( )과 보편 법칙( )으로 나뉜다. 그런데 설명이 건전(sound)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타당성 조건경험적 타당성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논리적 타당성 조건

(조건 1) 피설명항은 설명항의 논리적 귀결(consequence)이어야만 한다.

(조건 2) 설명항은 반드시 보편 법칙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며, 이 법칙은 피설명항을 도출하는 데 실질적으로(actually) 필요해야만 한다.

(조건 3) 설명항은 반드시 경험적 내용을 가져야만 한다. ,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실험이나 관측을 통해 설명항을 시험(test)할 수 있어야 한다.

 

경험적 타당성 조건

(조건 4) 설명항을 이루고 있는 문장들은 반드시 참이어야만 한다.

 

(사전 조건 진술들)

(보편 법칙들) 논리적 연역 (설명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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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되어야 할 경험적 현상에 대한 기술) (피설명항)

 

 

 

   위와 같은 도식은 과학적 설명(explanation)과 예측(prediction)에 동시에 적용된다. 어떤 현상이 먼저 주어졌을 경우 그에 대한 사전 조건들과 보편 법칙들을 결합하여 설명항을 구성했을 때 우리는 그 현상을 설명한 것이며, 또한 우리는 이러한 사전 조건들과 보편 법칙들을 결합해서 경험적 예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설명과 예측이 그 실용적인 측면에서만 구분된다는 것, 예측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과학적 설명의 중요한 특징이다. 단순히 관련된 현상을 나열하는 방식의 설명은 예측의 능력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런 설명에서는 보편 법칙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설명에서 결과에 대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위와 설명을 종종 인과적 설명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때의 인과적 혹은 결정론적 법칙이라 부르는데, 우리의 논의에서는 이러한 법칙만 다루고 통계적 법칙은 논외로 한다.

 

4. -물리적 과학에서의 설명 : 동기적(motivational)이고 목적론적인(teleological) 접근

 

   우리는 위와 같은 설명의 모형을 주로 물리 과학에서 이끌어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명의 패턴이 과연 다른 종류의 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하다. 1946년 가을에 미국에서 면화(cotton) 가격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뉴욕(New York), 뉴 오를리언(New Orleans), 시카고(Chicago)에서 일시적으로 면화 유통이 중단된 사례가 있는데, 이 경우도 유사한 패턴을 적용해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영어로 꿀벌(bee)”을 나타내는 단어가 프랑스 북부 지방에는 여럿 있는데 프랑스 남부 지방에는 하나 밖에 없는 현상 또한 유사한 패턴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인과적 유형의 설명 방식은 의도적인(purposive) 행동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몇몇 반론이 있다. 그러한 반론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째, 혼자서 혹은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행위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고 되풀이될 수도 없기 때문에, 특정한 조건에서 되풀이 될 수 있고 규칙성에 의존하는 인과적 설명이 적용될 수 없다는 반론.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물리 과학에서의 보편 법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보편 법칙이라는 것이 개별적인 개체가 가진 모든 특성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보편 법칙은 특정한 시공간에서 특정한 개체가 가진 어떤 특성(characteristic)이 발생한다는 것만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 상호간의 작용은 해당되는 상황뿐만 아니라 그 인간이 이전까지 가지고 있는 내력(previous history)에 의해서도 영향 받기 때문에 인과적 설명이 적용될 수 없다는 반론. 하지만 물리학에서는 자기 이력 현상(magnetic hysteresis)과 탄성 피로 현상(elastic fatigue) 현상을 인정하면서도 인과적 설명이 가능하다. 단지 이전까지의 내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과적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불합리한(non sequitur) 추론이다.

 

   셋째, 의도적인 행위는 인과적 분석보다는 목적론적인 설명(teleological)을 필요로 한다는 반론. 하지만 해당되는 현상을 결정짓는 동기(motive)나 믿음(belief) 또한 일종의 사전 조건(antecedent)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인과적 설명이 가능하다. 동기(motive)는 외부의 관찰자에 의해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지만, 물리학에서도 간접적인 시험을 통해 특성이 정의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그런 반론은 신빙성이 없다.

 

   생물학에서는 목적론적 설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목적론적 형태를 가진 생물학적 진술들은, 특정한 생물학적 특성이 생명 유지의 기능을 한다는 사실에 대한 기술적 진술들(descriptive statements)로 충분히 번역 가능하다. 물론 생물학적 현상에 대한 목적론적 고찰이 발견적인(heuristic) 도구로서는 유용할 수 있고, 그런 고찰이 우리의 인류학적 특성(anthropomorphic)과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이해는 해당되는 현상에 대한 이론적 혹은 인지적 설명과는 다른 것이다. 친숙함(familiarity) 혹은 공감(empathy)으로는 인간 행동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같은 개념들을 통한 어떤 현상의 사후적(ex post facto) 설명은 법칙이나 이론에 의해서 시험가능하지 않을 경우 인지적으로 의미가 없다.

 

3: 법칙과 설명에 대한 논리적 분석

 

6. 보편 법칙 개념의 문제점

 

   인과적 설명에서 보편 법칙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면, 대체 이론이란 무엇이고 법칙이란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법칙이란 참인 진술들에만 국한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또한 굿맨(Goodman)의 용어를 빌려 그것의 참 거짓 여부와는 별도로 보편 법칙의 특성을 가진 문장을 유사-법칙적(law-like)이라고 하고, 모든 법칙은 유사-법칙적 문장이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사-법칙적 문장의 특성은 무엇인가? 대개 유사-법칙적 문장은 보편적(universal)이며 조건적인(conditional) 형식의 진술이다. 그런데 조건적 문장은 비조건적 문장으로 변환이 가능하기 때문에 조건성은 유사-법칙적 문장의 본질적인 특성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보편성 또한 유사-법칙적 문장을 특징짓는 충분조건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진술 1 : “시각 t에 바구니 b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사과는 붉다.”

   라는 문장은 참이면서 보편적 형식을 가지지만 법칙이라고 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해당 영역이 제한되고 특정한 대상들만을 지칭한다는 의미에서 유사-법칙적 문장이 아니다.

 

   진술 2 : “이 냉장고 냉동실의 16개의 사각 얼음의 온도는 모두 섭씨 10도 이하이다.”

   (진술 1)(진술 2)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진술 2) 또한 해당 영역이 제한됨에도 불구하고, 행성 운동에 대한 케플러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적용범위가 무제한적인 좀 더 포괄적인 법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라이헨바흐(Reichenbach)의 용법을 따라 우리는 근본(fundamental) 법칙과 유도(derivative) 법칙을 구분할 수 있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유사-근본법칙적 문장을 찾는 것이 된다.

 

   그런데 (진술 1)의 문장은 로빈이 가지고 있는 달걀 모두는 초랑(초록색과 파랑색이 뒤섞여 있는)색이다.”라는 문장과는 다르다. 이 문장은 해당되는 달걀을 모두 경험적으로 점검해야 그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반면, (진술 1)그것을 구성하는 용어의 의미 그 자체만으로도 제한된 영역을 가지기 때문이다.

 

   진술 3 : 시각 t에 바구니 b에 들어 있는 모든 사과 또는 산화 제2철의 표본은 붉다.

 

   산화 제2철은 항상 붉기 때문에 (진술 3)은 참이지만 이 진술을 법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x는 철과(ferple)이다라는 표현이 “x는 시각 t에 바구니 b에 들어 있는 사과이거나 산화 제2철의 표본이다라는 의미를 갖도록 정의한다면, (진술 3)은 다음처럼 서술될 수 있다.

 

   진술 4 : 철과(ferple)인 것은 모두 붉다.

 

   이 문장은 보편적인 형식을 갖고 그 영역이 제한되지도 않지만 유사-근본법칙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 예를 통해 유사-근본법칙적 문장에 사용되는 술어(predicate), 즉 속성이나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들에 특정한 제한을 부여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유사-근본법칙적 문장의 술어에 순수하게 질적인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 , 그 술어의 의미에 대한 진술이 특정한 대상이나 제한된 시공간을 참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순수하게 질적인 술어라는 개념 그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위에서 제시한 규정 또한 문제가 있다.

 

   영어(English)와 같은 자연 언어가 아니라 형식 언어인 모델 L(모든 용어들이 원초 개념들 primitive이거나 원초 개념들에 의해서 명확하게 정의되었으며, 논리 법칙에 의해 잘 정의된 체계)을 통해서 그러한 술어를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언어의 원초 개념들 또한 그 언어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의미론적 법칙을 따라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 때 순수한 질적 특성을 부여하기 위한 타당한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다시 발생한다. 우리가 아무리 더 고차적인 형식 언어를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물론 논리적인 측면에서 위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제로 일반적이고 순수한 질적 특성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속성이나 관계론적 용어들에 대해, 그리고 그런 용어들을 유사-근본법칙적 문장에 사용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 비판적 논평

 

   소크라테스는 그의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단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순차적으로 보이는 동시에 어떤 진리(truth)에로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론적 전략을 사용한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과연 소크라테스의 대화(변증법, dialectics)는 이미 직관적으로 파악된 진리를 다듬기 위한 부수적인 방법일 뿐일까 아니면 희미한 안개에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necessary) 핵심적 방법인 것일까? 잘 알려진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밤새도록 혼자서 한 자리에 계속 서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소크라테스는 혼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으리라. 이성과 논리를 사용한다면, 혼자서 진행시키는 사유 그 자체도 충분히 변증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 뒤편으로 은근슬쩍 사라지려 하는 또 다른 의문 하나를 놓치지 말자. 소크라테스는 어쩌면 이와 동시에 진리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견해들을 비판하고 제한하기 위한 수사학적(rhetoric) 혹은 화용론적(pragmatical)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 사이의 유의미한 구획(demarcation)의 기준을 긋는 것, 그리하여 사람들이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실천하고 사회에서 정치적인 의사 선택을 행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을 때 비과학적 지식이 아닌 과학적 지식에 그 기초를 두게 하는 것은, 이른바 논리경험주의자(logical empiricists)들의 실천적인 목표였다. 20세기 물리학과 수학의 발전을 토대로 한 논리경험주의자들의 철학적 작업은, 모순을 유도해서 상대의 주장을 반박한 소크라테스와 유사한 방법론적 전략을 사용한다. 물리학과 수학의 지식이 기타 지식들에 비해 그 객관성과 합리성의 측면에서 월등하다는 것은 기본 전제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과학적 지식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핵심을 형식화(formulate)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형식화를 비과학적 지식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배제(exclude)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이런 형식화를 통해 기타의 과학들마저도 과학화 시킬 수 있지 않을까?

 

   특정한 과학적 원리를 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닌, 과학적 설명에서의 법칙이 어떤 역사적 경로를 통해 발전해왔는지를 추적하는 것도 아닌 방법, 과학적 설명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논리적인 (혹은 형식적인)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과학적 설명의 본성을 밝히려는 시도는 분명 실천적(혹은 수사학적 또는 화용론적)이다. 즉 이러한 시도를 통해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을 나누고, 인지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비과학적 지식을 인지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더 나아가 정밀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에 그러한 기준이 적용되게끔 하려는 의도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준은 충분히 타당하며 그것이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적절한 지침을 주는가? 그리고 그 기준을 통해 우리는 비과학적 과학마저도 과학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

 

   헴펠과 오펜하임이 제시하는 과학적 설명에 대한 연역-법칙적 모형(Deductive-Nomological Model)은 과학적 설명의 특징을 구분짓는 형식적 기준을 상당히 그럴싸하게 보여준다. 과학적 설명은 설명항과 비설명항으로 나뉘고, 설명항은 사전 조건(antecedent)과 보편 법칙으로 구성된다. 보편 법칙이 특정한 조건들과 결합해서 피설명항을 연역적으로 도출해내고, 이렇게 도출된 피설명항은 시험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경험적으로 유의미하다. 이 기준은 지금까지 알려진 수많은 과학적 설명들에 적용이 가능하며, 이 기준에 따라서 기존의 과학적 설명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이 기준을 물리적 과학이 아닌 기타 과학(생물학, 심리학 등)에 적용할 수 있으며, 이 기준에 따라 그 과학들의 설명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헴펠과 오펜하임의 생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준이 단순히 형식적 기준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을 비롯한 기타 과학들은 실제로 철학자들이 제시한 이 기준과는 상관없이 과학을 잘 발전시켜 왔다. 어느 시대에서나 특정한 과학의 분야에는 타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부합해서 많은 지지자들을 얻는 이론이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헴펠과 오펜하임의 기준을 가지고 굉장히 비과학적인 설명들을 비판하고 배제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너무도 명백하게 비과학적인 설명들을 효과적으로 배제하기 위해서 그런 철학적 작업을 할 필요가 있는가? 헴펠과 오펜하임은 사회에는 여전히 비과학적 설명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비과학적 설명들을 효과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건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필수적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그런 기준을 사용할 것인가? 어쩌면 그런 철학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천적인 전략이 존재하고, 그 전략을 위한 철학적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더 유의미하지 않을까?

 

   우리의 관심을 광범위한 지식이 아닌 과학적 지식과 과학자 집단에 제한해보자. 과연 연역-법칙적 모형은 과학자 집단이 과학적 지식을 실질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서 도움을 주는가? 어쩌면 그런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과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어떤 것이 건전한 과학적 논증인지 그렇지 않은 논증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자들은 과학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특정한 종류의 지식을 익히고, 언어적 능력과 수리적 능력 및 실험적 능력을 키우며, 과학계라는 집단의 복잡한 통과 절차를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성된 판단 능력은 연역-법칙적 모형이 제시하는 기준보다 더 까다롭고 복잡하게 과학적 논증을 판단하는 듯 보인다. 물론 이러한 형식적 작업이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이 작업은 철학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사소한(trivial) 의미만을 지니게 되는 것 같다.

 

   연역-법칙적 모형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 바로 보편 법칙(general law)의 개념이기 때문에, 헴펠과 오펜하임은 보편 법칙 또한 형식적 기준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분석한다. 보편 법칙은 그 영역이 제한되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 형식을 띠어야 하며, 보편 법칙에 사용되는 술어는 순수한 성질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통해서 우리가 보편 법칙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통찰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통찰이 우리로 하여금 과학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데, 좀 더 근본적이고 심오한 보편 법칙을 찾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헴펠과 오펜하임 본인들도 인정하는 것처럼,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접근만을 가지고는 법칙의 본성을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나은 접근은 없을까? 우리는 논리학적이고 형식적인 접근 말고 다른 방식으로 과학적 설명에 대해 탐구할 수 없는 것일까?

 

   이상의 논평은 이미 우리가 핸슨(Hanson), (Kuhn), 파이어아벤트(Feyenabend), 라카토슈(Lakatos) 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 거명한 인물들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과학에 대한 철학적 작업을 한 철학자들이 있었다. 푸앵카레, 마흐, 슐릭, 라이헨바흐, 바슐라르 등이 그들이다. 이른바 통합 과학 운동이 사회적 지식 전반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상당 수준 높였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지만 그러한 사회적이고 실천적인 맥락에서의 유의미성을 인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역-법칙적 모형이 과학 그 자체에 대한 이해에 특별한 통찰을 제공해 주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힘들다. 비판의 칼날은 예리했다. 우리는 벼려진 그 칼날을 비과학적 논증들을 물리치는 데 사용하되,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과학의 본성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090117설명논리연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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