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마음 편히 진보

강형구 2025. 3. 19. 09:13

   요즘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나의 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을 자주 갖는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삶의 특정한 몇몇 부분에서 매우 민감하고 불편했는데, 그 민감함과 불편함 정도는 이제는 훨씬 덜하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대체 왜 그렇게 민감하고 불편하게 느꼈냐? 이렇게 내게 물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는 학생 시절부터 책 읽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글 쓰는 일도 좋아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성향으로 인해 내가 어떤 종류의 특권 혹은 권위를 갖게 되기는 싫었다. 나는 아주 명석하지는 않았으나 공부를 좋아했기에 그것을 곧잘 했는데, 막상 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나니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성적이 되었다. 입학할 성적이 되는데도 나 스스로 입학하지 않을 필요는 없었기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서울대학교가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 나는 늘 학교에 다니면서도 어딘가 불편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학교 도서관이었다. 학교의 명성, 인맥 등에는 관심이 가질 않았고, 그건 나의 성향일 뿐이었다.

 

   나는 그저 그런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다. 예를 들면, 조국 전 장관처럼 빛나는 서울대 학생이 있지만, 절반 이상의 서울대 학생들은 그다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평범한 학생일 뿐이다. 게다가 나는 취업에 심각한 어려움을 갖는 인문대학 철학과 졸업생이었다. 대개 나처럼 평범한 학생은 계속 대학원에서 공부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그저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게 좋았기 때문에 무모하게 대학원 진학에 도전했던 거였다. 그게 성공했고, 나조차 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주 힘겹게 석사와 박사 학위를 끝냈다.

 

   한국장학재단, 국립대구과학관에서 일할 때 나는 나를 진보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내가 소속된 기관 자체가 정부를 대리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다. 내가 속한 국립목포대학교는 국립대학교이지만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있다. 나는 국가에 속해 일하는 교육공무원이며, 지역 국립대학교 교원으로서 지역 균형 발전을 지지한다. 지역 국립대학교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지역의 발전에 공헌하는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고, 현재 나는 그 기능에 참여하고 있다.

 

   게다가 더 흥미롭게도 나는 아주 운 좋게 대학교수가 된 실제 사례이다. 나는 대학 학점이 좋지 않고, 대학원 학점도 평범한 편이며, 직장 생활을 12년 가까이 했고, 박사 학위 논문을 영어로 쓰지도 않았고, 해외에서 박사후 연구원 경력을 쌓은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대학교수가 되는 과정에서 일절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다. 어쩌면 운명은 나와 같은 사람도 대학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 보여주려 한 것 아닐까? 그저 공부하기를 좋아했기에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계속 공부한 나와 같은 사람이 국립대학교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려 한 것 아닐까?

 

   내가 이해하기로 진보는 현재 우리 사회의 법, 제도, 질서 등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수준으로 ‘변화’시키고자 애쓰는 정치적 입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보수가 아니라 진보의 관점을 취한다. 특히, 현재의 수도권 편중 현상, 이른바 ‘인 서울 대학’에 대한 선호 현상 및 이와 관련된 대학 서열화에 반대하며, 전국의 국공립대학교가 평준화되고 지역별로 특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권적인 서울대학교가 없어지거나, 서울대학교에 준하는 위상을 가진 국립대학교가 전국 곳곳에 (최소 10개 이상) 설립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마음 편하게 스스로 진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늘 어딘가 불편했다. 서울대학교, 한국장학재단, 국립대구과학관에서.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 나의 본성 혹은 성향에 적합한 자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나에게 맞는다는 것이며, 나 아닌 사람들에게는 각자 자신에게 맞는 자리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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