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호기심을 가진 일반 시민

강형구 2014. 7. 20. 21:50

 

   몇 주 전부터 시작한 은혜의 잔기침이 가시질 않아, 구미에 장모님을 뵈러 갔다가 근처에 진료를 잘하는 한의원이 있다 해서 은혜와 함께 들렀다. 한의원의 이름은 송정코끼리한의원이었고, 한의사 선생님은 중간 정도의 키에 다소 마른 편이었고 인상이 밝고 선했다. 의사 선생님은 은혜의 체질이 소양인이라고 했다. 모든 일에 적극적인 은혜는 평소에 기력을 외부로 많이 발산하는 편이라 목에 습기가 없어져 기침을 한다는 진단이었다.

 

   나는 그 설명이 제법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은혜는 의도적인 운동을 거의 하지 않고 평소에 땀도 거의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관심이 많고,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는 온 정력을 쏟는다. 게다가 음식을 많이 먹지 않는다. 그렇기에 특별히 운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쉽게 체형 유지를 한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은혜는 숨기고 참기보다는 드러내고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외향적인 사람을 아마도 ()’의 범주에 든다고 하리라.

 

   나는 은혜와는 반대다. 예전에 부산에 살 때 동네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한의사 선생님께서는 나의 체질을 태음인이라고 진단하셨다. 나는 전체적으로 공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안정성을 중시한다. 나의 일 이외의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무관심하다. 나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히 타인의 입장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며, 사람들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피한다. 나는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숨기며 참는 것을 일종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향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사과정을 휴학할 때는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상황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과 논쟁을 잘 하지 못한다. 사실 철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기본적인 논쟁 능력은 필수적이지만, 나는 항상 논쟁이 매우 불편하며 논쟁을 통해서는 흥미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또한 인간관계에 있어 정치를 잘 못하는 편이라, 학계에서 살아남아 성공할 수 있는 유형에 속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의 지적 능력이 특별하게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늘 다른 똑똑한 사람들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직장을 다니면서 박사과정을 다시 밟고 있는 지금, 나는 전체적으로 홀가분한 기분을 느낀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의무들을 어느 정도 해 놓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해야 할 군복무의 의무도 마쳤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직업을 통해 매달 월급을 받고 있다. 게다가, 내 삶에서 가장 이루기 힘들 것 같았던 일인 결혼도 했다. 아마도 내 삶에서 해내야 하는 마지막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를 낳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기르는 일이리라.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내게는 학계의 다른 학자들과 경쟁하고 싶은 욕심이 거의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비록 내가 내 삶을 전적으로 헌신하지는 못하더라도, 과학철학이라는 학문 분야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것이다. 지난 학기에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두 가지 모두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가 선배님들과 동료들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다면, 나는 진심으로 나의 나머지 시간을 학문 연구에 바치고 싶다.

 

   물론 나는 내 학문의 깊이에 대해서는 크게 욕심을 내지 않는다. 어떻게 내가 평생동안 연구에 매진하는 분들과 나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아주 겸손한 일반인의 자격으로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을 아끼고 사랑한다. 오늘은 지난주부터 읽기 시작했던, 귀납에 관한 전영삼 선생님의 책을 끝까지 읽었다. 물론 내가 전영삼 선생님의 책에 있는 모든 내용을 세세하고 정확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책의 전체적인 주장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만족한다. 전영삼 선생님의 책을 읽은 다음에는 도서관에서 레너드 서스킨드(Leonard Susskind)의 온라인 강의를 책으로 옮겨 놓은 Theoretical Minimum이라는 책을 빌렸다. 이 책은 나이가 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나는 호기심이 있는 일반 시민으로서, 물리학 전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을 공부한다. 비록 박사과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일반 시민의 자격으로 순수한 나의 지적 욕구를 위해 공부를 한다. 나는 내가 지적 허영심 때문에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과학을 통해 자연을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열망은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예상할 수 없는 재난이 생겨 지구 곳곳이 파괴되고 아주 비극적이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 다시 인류가 일어서야 할 상황이 온다면, 나는 자연과학의 역사와 그 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한 사람으로서 아이들을 위한 초급 과학교육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일하고 싶다.

 

   지금의 나에게 과학과 철학에 대한 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싶은지를 원할 수는 없다.” 나는 나도 모르는 이유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과학을 좋아했다. 그 좋아함의 방식은 실제로 지금 현장에서 과학을 하고 있는 내 친구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관심은 나에게는 일종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인다. 나는 과학과 철학을 사랑하는 교양 있는 일반 시민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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