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월간 [뉴턴]을 정리하며

강형구 2021. 7. 8. 22:34

   얼마 전(한 달 전쯤)에 경북대학교 생물학과에 재직 중이신 한 교수님께서 대구과학관에 월간으로 발행되는 과학 잡지 [뉴턴]을 기증해주셨다. 잡지 [뉴턴]은 1985년 5월부터 발간을 시작했는데, 1985년 4월에 발간된 시험판부터 시작해 2016년 1월까지 발간된 잡지 모두를 과학관에 기증해주셨다. 그 분량이 상당했다. 잡지들을 과학관 수장고로 운반한 뒤 한동안은 이 잡지들을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며칠 전부터 업무에 약간 여유가 생기기 시작해서 오늘 오전부터 본격적으로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뉴턴]을 정리하며 확실하게 확인한 게 있다. 아인슈타인과 상대성 이론은 1년에 최소 1회 이상 잡지 [뉴턴]의 특집 주제로 실렸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하지 않는 해가 없었다. 아인슈타인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상대성 이론에 대한 설명 내용이 늘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 입문,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상대성 이론 등등. 1985년부터 시작해서 2016년에 이르기까지 상대성 이론의 의미와 의의를 기술하는 서사는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정형화된 서사가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서사를 통해서 상대성 이론을 배우게 되면, 이 이론이 당시에 어떤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했는지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실제로 1905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이 제시되었을 무렵, 이 이론은 로렌츠의 이론과 경험적인 측면에서 별반 차이가 없는 이론으로 여겨졌고, 당시의 많은 물리학자들에게는 로렌츠의 사고방식이 더 친숙하고 편하게 여겨졌다. 경험적으로 대등한 두 이론 사이에서 어떤 이론을 선택할 것인가? 이와 같은 물음이 제기되기 시작하면 이제 논의는 철학적 성격을 띠게 된다. 로렌츠의 이론이 더 자명한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더 단순한가? 어떤 의미에서 자명한가? 어떤 의미에서 단순하단 말인가?

 

   일반 상대성 이론도 마찬가지다. 이에 관한 많은 철학적 문제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만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중력이라는 물리적인 현상을 기하학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어떠한 추론 과정이 그러한 해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러한 추론 과정은 연역적인 것인가 직관적인 것인가? 중력을 기하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우리가 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객관성을 부정할 수 있는가? 우리의 시간과 공간 경험이 단지 시간과 공간의 계량적 특성에만 국한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계량적 특성 이외의 다른 특성들 또한 파악할 수 있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20세기 전반기에 물리학자들을 포함한 다수의 학자들이 상대성 이론에 대해 이와 같은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했고 이에 대해 서로 논쟁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성 이론에 대한 전형적인 서사가 확립된 오늘날에는 소수의 학자들을 제외하고 더 이상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정한 과학 이론에 대한 서사가 획일화되면서 이 이론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들은 획일화 된 서사 아래로 가려지고 잊힌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인슈타인마저도 원래의 아인슈타인이 아닌 박제화 된 아인슈타인이 된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 본인 또한 실제로 상대성 이론의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깊이 숙고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헤르만 폰 헬름홀츠가 철학적 물리학자였으며 “칸트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음을 알게 되었다. 막스 플랑크는 헬름홀츠의 제자이자 동료였고, 스승을 본받아 철학적 물리학자로서 활동했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을 인정하고 지지해 주었으며, 과학철학자 모리츠 슐리크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였고, 라이헨바흐 역시 플랑크로부터 물리학(+철학)을 배운 바 있었다. 플랑크 본인 역시 [물리철학]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20세기 전반기의 물리학자들은 오늘날의 물리학자들과 약간 달랐을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철학적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