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2020년을 정리하며

강형구 2020. 12. 16. 04:55

   막내 아들이 새벽 3시쯤 깨서 우유를 먹이고 안고 다독이며 재웠다. 아들이 잠이 든 후 아들 대신 내가 잠에서 깨어 이처럼 고요한 새벽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간에 딱히 할 만한 일이 생각나지 않고 이제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이라, 올 한 해에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정치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런데 그런 나조차도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내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실감한다. 나는 정부가 여러 측면에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대처는 여전히 잘 하고 있고, 최근 1~2주 간에 감염 확진자가 다소 많아졌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 상황을 잘 견뎌 내리라 본다. 중요한 법안들을 처리하고 있는 것, 법무부가 합법적 절차를 통해 검찰을 견제하고 있는 것 역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집값을 합리화하려는 정부의 굳은 의지와 노력은 가상하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정부 정책이 성공을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 예상한다. 과도한 집값이 국민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슬픈 현실이다.

 

   이제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올해 초에 과학철학 논문자격시험에 통과했다. 또한 올해 상반기에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가 출간되었다. 이 책의 출간으로 라이헨바흐가 상대성 이론에 대해 철학적으로 분석한 세 권의 책 [상대성 이론과 선험적 지식], [상대성 이론의 공리화], [시간과 공간의 철학]이 모두 우리말로 번역된 셈이다. 이는 이후 과학철학자들이 라이헨바흐의 철학을 연구하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 되리라 확신한다.

 

   올해 6월 중순에는 둘째와 셋째가 태어났다. 쌍둥이지만 이란성이라 생긴 것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아내가 쌍둥이를 출산하러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병원에서 아내의 곁을 지키며 틈틈이 학술대회 발표문을 썼고 이를 발전시켜 쓴 논문을 투고했다. 처음 투고 했을 때는 게재 불가 판정을 받았다. 이후 심사위원들의 의견을 토대로 논문을 수정해서 다시 투고하여 게재 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논문은 올해 11월 말에 발간된 [과학철학]에 수록되었는데, 제목은 “라이헨바흐의 ‘상대화된 선험성 개념’ : 그 출현과 전개”다. 논문을 두 편 게재해야 졸업할 수 있는 나에게는 나름 소중한 성과였다.

 

   과학관에서는 [자격루 상세설계 연구], [대한민국 산업과학기술사 연구]라는 두 건의 정책연구를 영남대학교 및 경북대학교와 협업하여 진행했다. 올해 10월부터 제4회 기증품 특별전 ‘도형의 아름다움’을 시작했다. 자격루와 관련해서는 정책연구 결과를 토대로 내년 예산을 확보하는 성과를 얻었고, 2017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산업과학기술사 연구도 비교적 내실 있게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본다. 기증품 특별전 ‘도형의 아름다움’은 나 스스로 몰입하고 즐기며 만든 전시였고, 이 전시를 위해 유튜버 과학쿠키님과 협업하여 만든 영상 또한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조금씩 과학관 연구원이자 학예사로서의 나의 입지가 굳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올해 2학기에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개설한 대학원 수업 [시공간의 철학] 조교로 활동한 것은 내게는 아주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한국교원대학교의 양경은 교수님께서 함께 참여하셨고, 이 주제에 대한 교수님의 연구 논문들을 함께 읽으며 교수님의 입장을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문맥을 따라 흄, 칸트, 푸앵카레, 마흐, 아인슈타인, 카시러, 러셀, 슐리크, 카르납, 라이헨바흐의 저술들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번 수업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철학, 특히 상대성 이론의 철학적 의의에 관해 논하는 것이 여전히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특수 상대성 이론이 말하는 물리적 상한 속도로서의 빛 속도, 빛 속도의 일정, 동시성의 상대성, 길이 간격의 상대성 등을 한 편으로는 놀라운 주장으로서 다른 한 편으로는 이미 잘 검증된 이론이 말하는 자명한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설명에는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문맥이 빠져 있다. 또한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일반 공변성의 의의를 중점적으로 강조한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시간과 공간에 물리적 실재성이 남아 있지 않으며, 물리적으로 객관적인 것은 오직 관측가능한 점-일치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경우 과연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이 어떤 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했는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어떠한 철학적 해명이 제시되었는지 또한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상대성 이론이 제시된 후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이론은 예전의 뉴턴 물리학이 그랬던 것처럼 학자들에게 일종의 ‘필연적’인 지식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이론이 제시된 당시에는 이 이론에 대한 경쟁 이론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이론의 의의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이 존재했다. 뉴턴의 생존 당시에 그의 이론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활발했던 것처럼 말이다.

 

   상대성 이론이 제시된 이후 형식적인 측면에서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하려는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하더라도, 상대성 이론의 의의를 평가하고 해석하는 문제는 여전히 유의미하다. 나는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뉴턴 이론의 의의를 평가하고 해석하는 문제 역시 영구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믿는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은 과학 이론이 영구적이고 확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철학적 논쟁들을 통해 태어나고 진화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학문이다. 과학사와 과학철학 속에서 과학의 역사적이고 철학적 성격은 일종의 담론으로서 보존된다.

 

   올해 세 아이들을 키우고, 회사 일을 하고, 하던 공부도 계속 하느라고 난생 처음 대상포진에 걸려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견뎌가며 지내니 시간은 흘러가고 어느덧 쌍둥이들도 많이 컸다. 내년에 나는 마흔이 된다. 논문을 한 편 더 투고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전공 자격시험을 통과한 후, 박사학위 논문 초고를 쓰려 한다. 과학관에서는 과학기술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고 전시하는 일, 우리나라의 산업과학기술사를 연구하는 일 또한 계속 진행할 것이다.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돌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내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자 삶의 원동력이다. 어쩌면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고 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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