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초보 연구자

강형구 2020. 11. 16. 11:54

   과학사와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나의 전문 연구 분야는 20세기 전반기의 과학철학 역사이다. 20세기 전반기의 중요한 과학철학 분야로는 수리철학과 물리철학이 있다. 이 시기에는 수학의 기초에 관한 철학적 논의가 활발했다. 수학을 논리의 바탕 위에 두려는 논리주의(화이트헤드, 러셀), 수학의 기초를 형식적인 공리 체계로 보려는 형식주의(힐베르트), 수학을 인간 이성의 직관적 추론 능력 위에 기초하려는 직관주의(브라우베르, 바일)가 서로 경합을 벌였다. 20세기 전반기의 수리철학 논의들을 상세하게 들여다보고 그 철학적 함축을 상세하게 밝히는 학문적 작업이 필요한데, 우리나라에는 이를 연구하는 학자가 부족한 상황이다. 서울대학교의 박세희 교수, 연세대학교의 김상문 교수께서 수리철학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 바 있으나, 최근 이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국내 학자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이 등장했다. 상대성 이론을 통해 뉴턴 역학이 전제했던 절대 시간, 절대 공간 개념에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과연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는 시간과 공간은 무엇일까?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은 물리적 실재성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때의 ‘물리적 실재성’이란 무엇인가? 상대성 이론이라는 물리학 이론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이론은 세계의 관측가능한 양들 사이의 관계를 체계화하는 추상적인 수학 이론일 뿐일까? 이론과 세계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인 대응 관계일까 구조적 혹은 기능적 대응 관계일까? 물리적 현상을 기술할 수 있는 복수의 수학적 체계가 가능할 때, 그 복수의 체계는 서로 같은가 다른가?

 

    이상과 같은 모든 문제들은 아인슈타인 자신이 직면했던 철학적 문제들이다. 뉴턴 역학의 경험적 성공과 별도로 이 역학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성 이론의 경험적 성공과는 독립적으로 이 이론이 제기하는 철학적 질문들이 있다. ‘상대성 이론의 역사와 철학’은 현대 물리학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연구되어야 하는 분야이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외국의 과학사․과학철학 전공자들의 수는 많지 않고, 국내에서도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존 스테이철, 존 이어먼, 존 노튼, 위르겐 렌, 미셸 얀센 등과 같은 20세기 물리학사 전공자들의 노력을 통해, 현재로서는 상대성 이론의 역사와 철학이 그 윤곽을 제법 자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국내의 연구자들은 이들의 연구 성과를 잘 소화하여 국내에 소개하고, 더 나아가 이 분야에 대한 심화 연구를 통해 학문적으로 추가적인 기여할 필요가 있는 상황이다.

 

    국내 학자로는 포항공과대학교의 임경순 교수께서 상대성 이론의 역사에 대해 기여하신 바가 있고, 영산대학교의 구자현 교수께서도 아인슈타인의 글들을 번역함으로써 기여하신 바가 있다. 상대성 이론의 철학으로 잘 알려진 논리경험주의자 한스 라이헨바흐에 대한 연구는 전 서강대학교 교수였던 이정우 박사, 고려대학교의 우정규 박사, 전북대학교의 김회빈 박사께서 부분적으로 제시하신 바 있다. 나는 스스로를 이와 같은 학문적인 전통 아래에 있다고 평가한다. 상대성 이론의 철학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라이헨바흐 이전의 헤르만 헬름홀츠, 앙리 푸앵카레, 에른스트 마흐를 연구할 필요가 있고, 라이헨바흐와 동시대인인 에른스트 카시러, 모리츠 슐리크, 아서 에딩턴, 헤르만 바일을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라이헨바흐 이후의 연구자인 아돌프 그륀바움, 로렌스 스클라, 마이클 프리드먼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비 브라운, 로버트 디사 등은 비교적 최신의 연구자들이고, 한국교원대학교 양경은 박사께서 이러한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기여를 하신 바 있다.

 

    양자역학의 역사와 철학은 상대성 이론의 역사와 철학만큼이나 연구할 내용이 풍부하다. 아인슈타인, 보어, 드브로이, 보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파울리 등과 같은 철학자-물리학자들의 논의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 이후 세대 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과 존 벨의 연구 또한 철학적 관점에서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에른스트 카시러, 한스 라이헨바흐는 양자역학을 철학적 관점에서 상세하게 분석한 초기의 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양자역학에 대한 과학철학적 분석은 반 프라센에게 이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분야에 대한 나의 지식이 짧아 오늘날 이 분야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국내에서 양자역학을 철학적으로 논하고 있는 학자로 서울대학교의 장회익 교수, 부산대학교의 김유신 교수, 한국과학영재학교의 김재영 교수, 한경대학교의 이정민 교수가 계신다.

 

    초보 연구자인 나의 과학사 과학철학 연구는 위에서 간략하게 개괄한 연구의 전통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연구 전통 없는 연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배 연구자들이 만들어 놓은 연구의 전통 아래에서 내가 연구를 하고, 나의 후배 연구자들은 나를 비롯한 21세기 전반기의 연구자들이 만들어 놓은 연구의 전통을 참고하여 자신만의 연구를 진행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