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이란? / 형식 의미론의 간략한 역사
언어철학이란?
기존에는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적 전통이 분명히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그 둘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일례로 기존의 과학철학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띤 토머스 쿤(Thomas Kuhn)의 철학은 대륙철학에서의 구조주의 혹은 후기 구조주의와 유사한 성격을 보인다. 쿤이 프랑스의 과학사학자 코이레(A. Koyré)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또한 참고하자. 그리고 과학철학과 밀접히 연관된 언어철학적 전통에서도 언어적 진술의 참과 거짓이 논리적 성격이 아닌 맥락적(contextual) 성격에 의해 좌우된다는 논의가 활발하다. 얼핏 보면 영미철학이 대륙철학의 요소들을 상당부분 포섭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이 포섭(inclusion 또는 capture)의 과정인지 변형(transformation)의 과정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말하기 힘들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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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언어철학이라고 할 때 이 개념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언어에 대한 철학(Philosophy of Language)이다. 언어에 대한 철학은 언어 그 자체의 본성에 대해서, 특히 언어에 있어 의미(sense)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수행한다. 다른 하나는 언어적 철학(Linguistic Philosophy)라는 뜻으로, 이는 철학적 방법론의 일종이다.
그러면 왜 언어인가? 언어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고유한 특성(창조성)을 가진다. 따라서 언어의 본성을 밝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밝히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철학적 탐구가 필요한 것일까? 언어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언어학이 있지 않은가? 아직까지 의미에 대한 정확한 과학이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물리학의 일부 개념들을 다루거나 물리학적 지식이 세계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에 대해 논하는 철학적 작업이 있기는 하지만, 물리학에 대한 철학과 물리학은 기본적으로 별개로 진행되고 있으며 철학이 물리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언어학의 경우는 다르다. 언어학에서의 의미에 대해서는 물리학과 비견될 만큼 특화된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다. 과연 의미 이론이 어떤 식으로 수립되어야 하는지, 의미에 대한 과학이 가능이나 한 지에 대해서도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 언어적 의미에 대한 탐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철학 자체에서의 관심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전통적으로 철학의 중요한 두 분야가 바로 형이상학(metaphysics)과 인식론(epistemology)였는데,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외부 세계를 인식한다. 따라서 외부 세계를 인식하게 해주는 언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언어에 대한 철학과 언어적 철학(Linguistic Philosophy)은 다르다. 이 언어적 철학 운동은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 아주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운동은 철학적 방법론으로서의 언어적 철학을 주장하며, 이에 따르면 기존에 철학적 문제들이라고 알려져 있던 것들이 실제로는 언어적 문제라는 것을 밝힐 수 있다. 철학의 방법론, 철학의 본성에 대한 특정한 견해로서의 언어적 철학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으로부터 출발하며 언어 분석을 통해 철학적 문제들이 해결되거나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적 철학의 대표적인 두 경우로 버트런드 러셀(Russell)의 기술 이론(theory of description)과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의 검증성 원리(Principle of Verification)를 들 수 있다. 혹자는 러셀의 기술 이론을 철학에서의 패러다임(paradigm of philosophy)라고까지 평했지만, 이러한 언어적 철학이 유일하게 옳은 철학의 방법론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 세미나는 언어적 철학이 아닌 언어에 대한 철학(philosophy of language)을 다룬다. 특히 의미의 본성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는 의미의 맥락 의존성에 대해 살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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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간략하게 요약해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그의 “논고”를 통해서) 세계에 대한 그림 이론을 제시했다. 그런데 후기에는 그러한 자신의 이론이 갖는 한계를 느끼고 맥락 이론을 제시하게 된다. 이런 해석은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서의 핵심적인 개념은 전기와 후기에 공통적으로 ‘사용(use)'의 개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를 사용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사용 의미론자였다. 그런데 전기와 후기의 사용 개념이 다르다. 전기에서 사용이 진리 함수적 개념이었다면, 후기에서는 사용의 맥락 의존성이 중요해진다. 그런데 ’사용의 맥락 의존성‘이란 사실 동어반복적인 표현이다. 사용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맥락 의존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초기 철학으로부터 철학적 진술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실제로 철학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후기에는 아예 철학적 진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진술들에 대한 철학적/비철학적 사용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의미가 없는 진술이란 없으며, 모든 진술들은 맥락 의존적이다. 과연 의미는 맥락 의존적인가?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맥락 의존적인가? 만약 의미가 맥락 의존적이라면, 그것의 철학적 함의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해서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집중적으로 다루려 한다.
의미(meaning)
사용(use)
맥락 의존성(context-dependency)
Wittgenstein : 의미는 본질적으로 맥락 의존적이다.
하지만 기존의 언어철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에 의하면 대체로 의미는 맥락 독립적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표준적 견해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 근거는 무엇일까? 표준적 견해는 어떤 발전의 과정을 거쳤으며 최근에 어떤 이유 때문에 반론에 부딪치게 된 것일까?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형식 의미론의 간략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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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적 견해인 “의미는 대체로 맥락 독립적이다”라는 견해를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1) 지표어(indexicals)를 제외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맥락 독립적이다.
여기서 지표어란 지시대명사(이것, 저것,...), 인칭대명사(그, 그녀, 나,...) 그 외에도 ‘어제’, ‘오늘’, ‘내일’, ‘여기’와 같은 단어들을 뜻한다.
Ex)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이다.
(2) 언어적 표현의 ‘사용(use)'은 많은 경우 맥락 의존적이다. 그러므로 ’의미‘는 ’사용‘과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
Ex1) 과연 하이데거가 진정한 철학자인지에 대해서 두 사람이 논의를 하고 있다. 도중 하이데거를 부정 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그래, 하이데거는 철학자야.”라고 말한 다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허경영은 철학자야.” 이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Ex2) 김철수가 교수에게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교수는 추천서에 “김 철수는 글씨를 잘 쓴다.”라는 한 문장만을 적는다. 이 경우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3) 의미의 본성을 다루는 것은 의미론(semantics)이고, 사용의 본성을 다루는 것은 화용론(pragmatics)이다. 이 둘은 서로 엄격하게 분리된다.
(4) 의미에 대한 형식 이론이 가능하다. 이른바 진리조건 의미론이라고 말하고, 이는 데이빗슨 식의 진리조건 의미론과 몬테규․데이빗 루이스 식의 가능세계 의미론을 모두 포함한다. 또한 지표의 맥락 의존적 의미를 설명하는 형식이론조차 가능하다(카플란의 지표어 이론).
(5) 언어적 표현은 맥락 의존성에 의해 의미가 아닌 함축(implicature)에서 차이가 난다. 함축을 다루는 대표적인 이론으로 그라이스의 함축 이론을 들 수 있다. 화용론이 다루는 대상은 함축 + 언화행위적 속성(오스틴, 썰의 화행이론)이다.
(6) 지표어를 제외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맥락 독립적이므로, 의미는 기본적으로 언어적 표현 유형(type)의 속성이다. 함축과 언화행위적 속성은 맥락 의존적이므로, 함축과 언화행위적 속성은 언어적 표현 개별자(token)의 속성이다. 즉, 언어적 표현 유형(type)과 개별자(token)를 구분할 수 있다. 의미론은 유형(type)으로서의 문장(sentence)을 다룬다. 화용론은 개별자(token)로서의 발화(utterance) 혹은 진술(statement)을 다룬다.
그런데 최근 위와 같은 입장과는 달리 ‘의미는 발화의 속성’이라는 ‘맥락주의’가 등장했다. 르카나티(Recanati), 트래비스, 힐러리 퍼트넘, 노엄 촘스키 등에게서 그런 주장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일종의 후기-비트겐슈타인적인(post-wittgensteinian)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왜, 어떤 과정을 통해 표준적 견해가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언어의 창조성(creativity) 혹은 의미의 창조성은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였다. 우리는 무한히 많은 수의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문장들을 사용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러한 창조성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창조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를 설명하는 가장 유력하고 믿을 만한 원리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의미의 조합성 원리(Principle of the Compositionality of Meaning)”였다.
의미의 조합성 원리를 두 부분으로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① 복합 표현의 의미는 그 표현을 구성하는 단순 표현들의 의미와
② 이 단순 표현들의 결합 방식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때 단순 표현들의 의미는 맥락 독립적이라는 것이 가정되기 때문에 의미의 조합성 원리는 의미의 맥락 독립성을 지지하게 된다. 그렇다면 의미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 조합되는 것일까? 그 조합의 방식을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 원리는 유명무실한 것이 된다. 의미 조합의 방식에 대해서 최초로 그럴 듯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프레게(Frege)이다. 그런 까닭에 프레게는 현대적 언어철학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혹자는 ‘프레게 이전의 철학은 철학이 아니었다’라는 주장까지 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프레게가 의미의 조합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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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논리학에서는 범주(category)만 다루었을 뿐 관계(relation)을 다루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Kant is a philosopher.”라는 문장이 있을 경우, 이 문장은 “Kant”라는 주어 부분과 그 주어 부분의 속성인 “is a philosopher”로 나눌 수 있었다. 이에 대해 프레게는 최초로 이항관계의 술어를 제시했다. 즉, “Kant”와 “a philosopher”라는 두 요소를 맺어주는 ‘관계’에 대해 사고한 것이다.
프레게는 수학적 개념을 도입해서 술어의 특성을 밝히려 한다. 그에 의하면 술어는 함수를 가리킨다. 함수란 수학에서 사용되는 더 광범위한 개념인 관계(relation)의 특수한 경우로, 그 정의에 따르면 어떤 수 x가 주어졌을 때 함수 f는 이에 대해 단일한 값인 y를 산출한다. 중요한 것은 함수의 본성이 “채워져 있지 않음”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x is a philosopher.”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는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x에 어떤 개념이 제시되느냐에 따라서 그 문장의 진리값이 달라진다. 술어라는 함수가 산출하는 것은 참 혹은 거짓이라는 진리치(Truth Value)이다. 이를 수학적으로 도식화하면 f : D → TV가 되고, 이 때 정의역은 개념이고 치역은 진리치다. 프레게는 문장의 결합 방식이 “함수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프레게적 의미에서 모든 문장들은 T 또는 F의 진리치만을 가지고, 그런 의미에서 이는 자연 언어의 의미를 밝히는 데는 실패하는 것 같다.
프레게에 있어 “의미”는 뜻(진리조건)과 지시체(진리치)로 나뉜다. 예를 들어 “Kant is a philosopher.”라는 문장이 있을 경우 이 문장의 진리 조건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Kant is a philosopher.'은 참이다.]라는 문장은 오직 칸트가 철학자일 때에만 참이다.” 즉, 우리가 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이 문장의 진리 조건을 알고 그에 따라 이 문장의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프레게에 의하면,
① 어떤 문장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그 문장의 진리 조건을 안다는 것이다.
② 문장의 지시체뿐만 아니라 문장의 뜻도 함수적이다.
중요한 것은 문장의 뜻, 그러니까 문장의 진리조건 또한 함수적이라는 것이다. 프레게는 함수를 통해 단순 표현들의 의미를 규정하는 공리, 단순 표현들의 지시체를 규정하는 공리, 단순 표현들 사이의 함수 관계를 규정하는 공리, 단순 표현들의 결합 방식을 제시하는 공리 등을 전제로 해서 무한히 많은 문장들의 진리치를 결정할 수 있음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이런 프레게의 업적은 과학 언어에 대한 형식 의미론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는 과학 언어뿐만 아니라 자연 언어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형식 의미론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자연 언어에 대한 형식 의미론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답을 제시한 학자가 바로 카플란(Kaplan,「Semantics of Demonstrative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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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플란에 의하면, (1) 의미는 특성(Character)과 내용(Content)으로 구분된다. 이 때 내용을 ‘말해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내용에는 지시체와 진리조건이 포함된다. ‘철수’, ‘철학자임’과 같은 대부분의 개념들은 특성과 내용이 일치한다. 즉 ‘철수’는 철수를 의미하고, ‘철학자임’은 철학자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 ‘어제’와 같은 지표어들은 특성과 내용이 서로 구분된다. ‘나’라는 단어는 실제의 나를 가리키는 ‘특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단어가 실제의 ‘나’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지표어가 포함되어 있는 발화의 의미는 그 발화의 특성과 내용의 함수이다. 기존에는 자연 언어에 맥락 의존적인 지표어가 포함되어 있는 까닭에 자연 언어에 대한 형식 의미론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카플란의 구분과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발화의 의미가 특성과 내용의 함수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에 자연 언어에 대한 형식 의미론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3) 지표어가 포함된 자연 언어에 대해서도 형식 의미론을 발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지표어와는 무관한 요소에 의해서도 문장의 의미가 달라지는 많은 사례가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맥락(context)인 것 같지만, 문제는 맥락을 형식화할 수 있느냐이다.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맥락에 대해서 설명이라도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에 대해 함축 이론(Theory of Implicate)을 통해 답하려 했던 학자가 바로 그라이스(Grice)다.
스트로슨(Strawson)은 논리상항들이 자연 언어에 단일하게 대응되지 않는 것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논리학에서의 ‘&’는 ‘and'에 대응될 수도 있고 ’but'에 대응될 수도 있다. 다음의 두 문장을 생각해보자. A : 장기하는 서울대학교 졸업생이다. B : 장기하는 가수이다. 이 때 논리학에서의 A & B는 “장기하는 서울대학교 졸업생이다. 그리고 장기하는 가수이다.”를 의미할 수도 있고 “장기하는 서울대학교 졸업생이다. 그러나 장기하는 가수이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일상 언어에서는 두 표현의 의미가 서로 다른 것 같다. 이런 스트로슨의 문제 제기에 대해 그라이스는 두 표현의 의미는 같다고 대응한다. 왜냐하면 두 표현의 진리 조건이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라이스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는 함축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라이스는 다음과 같은 구분을 도입한다.
What is said(의미론, 말해진 것) / What is implicated(화용론, 함축된 것)
이어서 그라이스는 ‘함축된 것’에 대한 이론을 전개한다. 이 때 그가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바로 협동의 원리(principle of cooperation)다. 우리는 일반적인 경우 상대방이 실제로 말하는 것과 실제로 함축하는 것이 유사하다는 가정 하에 언어 행위를 한다. 그런데 이런 원리를 어기는 경우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대화의 네 격률(Conversational Maxims), 즉 양의 격률․질의 격률․관계의 격률․양상의 격률을 따라서 말해진 것의 함축을 추론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그라이스에게 중요한 것은 함축된 것에 대한 추론이 의미론에서의 조합적 추론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제 기존의 견해가 언어에 대해 다룰 수 있는 범위를 간략히 정리해보자.
○ 지표어를 포함한 자연 언어 : 카플란의 이론을 통해 형식 의미론으로 설명 가능하다.
○ + 함축 : 이는 그라이스의 함축 이론으로 설명 가능하다.
○ + 언화행위 : 이는 오스틴․썰 등의 언화행위 이론으로 설명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기존의 견해는 언어 현상을 매우 깔끔하고 아름답게 설명해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실제로 예를 하나 들어서 기존의 입장이 언어 현상을 설명하는 절차를 살펴보자.
철수 : “새 학기가 시작하니 참 기분이 좋네.”
영희 : “나는 어제 하루 종일 울었어.”(A)
철수 : “왜?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어?”
이 경우 영희의 발화(편의상 A라 하자)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Step 1 : A라는 문장의 유형에 대해, 즉 A라는 문장을 특성과 내용의 측면에서 분석한다. 분 석 결과 A라는 문장에는 '나‘, ’어제‘라는 지표어가 등장한 것으로 파악된다.
Step 2 : ‘나’와 ‘어제’라는 지표어의 의미는 (카플란의 이론에 의해) 파악된다.
Step 3 : A라는 문장의 내용이 파악된다. 즉 what is said, 의미론에서의 의미, 진리 조건이 파악된다.
Step 4 : 그와 더불어, 문장 A의 함축이 (그라이스의 함축 이론을 통해) 파악된다.
의사소통이 실패한 경우에는 Step 1에서 4까지의 단계 중에 어떤 단계에서의 문제 때문에 실패했는지를 밝힐 수 있다. 특히 Step 4단계에서 의사소통이 실패했을 경우, 우리는 대화자가 비합리적인 사람이었거나 대화의 격률을 따르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의미론(카플란의 지표어 이론을 포함) : 특성 / 내용
화용론(함축된 것 혹은 맥락) : 언화행위 이론(오스틴․썰) / 함축 이론(그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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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위와 같은 표준적 견해에 대한 반대가 등장한다. 이 반대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표어를 포함하지 않은 문장들의 진리 조건 또한 맥락 의존적이다. 더 나아가 거의 대부분의 자연 언어적 문장들의 진리 조건은 맥락 의존적이다. 이러한 문장들의 예를 들어 보자.
① 모호한(ambiguous) 문장 : “철수는 대머리이다.”
☞ 어느 정도 머리가 없을 경우에 대머리라고 부를 수 있는지가 불분명하다.
② 전칭 양화사가 포함된 경우 : “모든 학생이 기호논리학 수업에 출석했다.”
☞ 말 뜻 그대로라면 세계에 있는 모든 학생을 의미하지만, 맥락상 그런 의미가 아니다.
③ 비교 형용사가 포함된 경우 : “박지성은 키가 작다.”
☞ 누구를 기준으로 키가 작은 것인가? 축구선수 치고는 키가 작은 것인가?
④ “철수는 빨간색 사과를 들고 있다.”
☞ 주변의 모든 사물들에 빨간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방 안에 있을 경우 철수가 들고 있는 사과가 그다지 빨갛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⑤ “영희는 결혼을 했다.”를 A라 하고, “영희는 세 자녀를 두었다.”를 B라고 하자.
☞ A and B는 참이지만 B and A는 참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둘 사이에는 의미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반례들에 대해 세 가지 대처 방안이 제시되었다.
(1) 맥락주의 : 표준적 견해를 완전히 포기하자. 즉 진리조건 또한 의미론이 아닌 화용론에서 다루어야 한다. 의미론 / 화용론의 엄격한 구분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진리 조건에 대한 형식적 의미론을 수립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후기-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입장을 지지하며 다소 급진적인 방안이라 할 수 있다.
(2) 최소주의 : 맥락 의존성을 받아들이더라도 의미론 / 화용론의 구분을 유지할 수 있다. 의미론의 대상은 진리 조건이 아니다. 진리 조건의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대신 의미론은 의미적 내용(semantic content), 즉 발화시에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는 공통된 내용만을 다룬다.
(3) 지표주의 : 진리 조건의 조합성 원리는 포기될 수 없다. 우리는 지표어가 없는 문장들 속에서 우리는 숨겨진 지표어를 찾을 수 있고, 그러한 발견에 대한 이론 수립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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